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81 ~ 19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강서군 성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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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0)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성태면(星台面) 연곡리(硯谷里) 출신이다. 1919년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8세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881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4일 모락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모락장은 5일장이며, 평남 강서군 반석면(班石面) 상사리(上四里)와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원장리(院場里) 사이에 섰다. 두 지역은 장날에는 서로 왕래가 잦았고, 장로교 소속 교회 네 곳도 서로 인접하여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 원장리에 원장교회(院場敎會)가 있었고, 그로부터 남쪽 3km 지점 산수리(山水里)에 산수리교회(山水里敎會)가 있었다. 상사리에는 반석교회(盤石敎會)가 있었고, 여기서 10km 떨어진 반석면 반육리(班六里)에 사천교회(沙川敎會)가 있었다. 이들 교회들이 연합하여 1919년 3월 4일에 일으킨 모락장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시위 계획은 반석교회 장로이며 사립반석학교를 설립·운영하던 조진탁(曺振鐸) 장로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진탁이 3월 1일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거행된 독립선포식과 거리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몇 장의 독립선언서를 얻어 돌아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조진탁은 귀가 길에 원장교회에 들려 장로인 윤상열(尹相悅)·고지형(高志亨)·차현구(車玄九)를 만나 평양에서 있었던 독립선포식과 만세시위를 설명하고 원장교회와 반석교회는 물론 산수교회와 사천교회까지 연합하여 원장 장날인 3월 4일 대대적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고지형·윤상열·차현구는 곧바로 원장교회 부설 사립합성학교(私立合成學校) 교감 임이걸(林利杰) 장로와 산수리교회 조승익(曺承翊) 장로에게도 시위 준비를 당부하였다. 차현구 장로는 반석교회 최능현(崔能賢) 장로와 백이옥(白履玉) 영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최능현은 사천교회 송현근(宋賢根) 목사에게도 거사 계획을 알렸다. 송현근 목사는 김해진(金海鎭)의 집에 교회 간부를 소집하여 모락장에서의 별도의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런데 헌병보조원에게 발각되어 김해진을 비롯한 10여 명이 검거되었다. 송현근은 조진탁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3월 4일 10시 원장 합성학교 운동장에서는 천여 명이 모여 독립선포식을 거행하였다. 원장교회 차병규(車炳奎) 장로의 기도로 시작하여 지석용 장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어 임이걸이 독립선포식을 가져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40분간 연설하였다. 그리고 평화적 시위임을 선언하고 대형 태극기를 높이 들어 앞세우고 나팔수를 선두로 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원장 시장을 향해 행진하였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합성학교 교정으로 돌아올 때는 많은 군중이 뒤따랐다. 이때 최능현과 송현근이 모락장 시위는 사전에 발각되어 계획이 좌절되었음을 알리고 헌병대 유치장에 갇힌 동지들을 구하자고 호소하였다. 시위 군중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청년이 선두에 서고 노인과 여성들이 뒤따르며 헌병대가 있는 모락장으로 향하였다. 모락장에 거의 도착하여 언덕길을 넘으려 하자, 사천헌병분견소장 사토(佐藤實太郞)와 헌병보조원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사상자가 나면서 격분한 시위 군중은 돌을 던지고 맨주먹으로 저항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사토는 분견소에 몸을 숨기고 계속 총을 쏘았고 헌병보조원들은 도망갔다. 시위 군중이 분견소에 불을 지르자 사토가 도망가다 사망하였고, 헌병보조원 2명도 맞아 죽었다. 시위 군중은 유치장에 갇혀 있던 동지들을 구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일제 헌병대가 출동하여 400여명을 검거하였다. 3월 4일 모락장 시위에서 사망한 사람은 19명이었고 부상자는 40여명을 넘어섰다. 이날 체포된 시위 군중 대부분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49명은 평양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날 모락장 시위에서 일제 헌병을 처단하고 헌병분견대에 불을 지른 혐의로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8월 13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항소하였으나, 1919년 11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불복하여 다시 상고하였으나, 1919년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그러던 중 1925년경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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