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海東
海東1896. 5. 12 ~ 1933. 2. 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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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5) 1896년 5월 12일 강원도 울진군(蔚珍郡) 평해면(平海面)에서 태어났다. 이후 본적지인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선양동(宣陽洞)으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평창(平昌)이며, 이명으로 이회동(李悔東)을 쓰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17일 예안면 장날에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과 면서기 이광호(李洸鎬), 잠업(蠶業) 순회교사 이시교(李時敎) 등이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이끌었다. 주도자들은 면사무소 숙직실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며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예안 만촌교회 기독교도와 안동군 유림들도 같은 날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3월 17일 거사 당일 장터에서 일을 보던 중 면사무소 뒤편에서 큰 함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듣게 되었다. 30여 명의 군중이 선성산(宣城山)에서 일본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린 후 만세를 연호하였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장터에서도 30여 명으로 구성된 시위대가 갑자기 세 곳에서 뛰어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선성산과 장터에서 연이어 터져 나온 만세소리에 지체 없이 시위대에 동참하여 장터를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장꾼과 주민들의 참여로 만세시위는 열기를 더해갔다. 만세소식에 일제 경찰은 시위대가 주재소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수비대까지 동원해 무력을 행사하였다. 일제 경찰은 주도자 등 15명을 체포하였다. 주도자들이 현장에서 체포되면서 군중도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장터에 머물며 만세운동 상황을 지켜보다가 주도자들이 주재소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오후 6시경 1,5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에 도착하여 시위대와 함께 일제 경찰의 횡포에 맞서 투석전을 벌이며 주재소 안으로 들어갔다. 구속자 탈환을 위해 일제에 맞서다가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에게 붙잡혔다. 일제 경찰이 휘두른 총검에 여러 사람이 부상을 당하고 25명이 붙잡히면서 시위대도 해산하였다. 붙잡힌 이후 3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그 해 4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징역 6월이 그대로 유지되자 상고하였다.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면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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