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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洪

鍾洪

1869. 7. 10 ~ 192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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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鍾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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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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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3)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예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3) 1869년 7월 10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녹전면(祿轉面) 녹래동(祿來洞)에서 태어났다. 한자가 다른 이종홍(李鐘弘)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17일 안동군 예안면(禮安面) 장날에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예안면 만세시위는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 잠업(蠶業) 순회교사 이시교(李時敎), 면서기 이광호(李洸鎬)·이중원(李中元)·이남호(李南鎬) 등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먼저 만세운동을 거행하기로 결의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등사하면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조수인(趙修仁)·이원영(李源永)·조방인(趙邦仁) 등의 유림과 신응한(申應漢)·민태규(閔泰圭) 등 예안 만촌교회 기독교인들이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거사 당일인 3월 17일 오후 3시 30분경 장터에 있다가 갑자기 만세소리를 듣게 되었다. 먼저 예안면사무소 뒤편에 위치한 선성산(宣城山)에서 20~30명의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였고, 이를 신호로 장터 주변 세 곳에서도 동시에 중앙으로 100여 명의 사람들이 달려 나와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유림과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장터에 있던 주민·장꾼들과 함께 시위대에 참여하였고, 학생들까지 동참하면서 만세시위는 점점 고조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일제 경찰은 수비대까지 동원하며 시위대의 해산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동봉(李東鳳) 등의 주도로 시위대는 예안경찰관주재소로 행진하였고, 길가에 있던 학생과 주민들도 호응하며 만세시위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주도자 등 15명이 일제 경찰에게 붙잡히면서 시위대는 잠시 해산하였다. 오후 6시경 흩어졌던 시위대와 함께 다시 한 번 주재소로 향하였다. 1,5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주재소에 도착하였고, 일제 경찰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주재소 문과 유리창에 돌과 기왓장을 던지며 내부로 진입을 시도하였다. 이처럼 주재소에 구속된 인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만세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다시 수비대를 급파하였다. 이후 일제 군경이 총·칼로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면서 만세시위는 마무리 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도자들과 함께 현장에서 붙잡혔고, 조사 이후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3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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