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容漢
容漢1897. 10. 3 ~ 1977. 2. 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8)
관련 사건
- · 대구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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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8) 1897년 10월 3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산면(豐山面) 하리리(下里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임석백(林碩佰)이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독교 전파를 위한 안동기독전도대(安東基督敎傳道隊)의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8일 대구부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대구에서는 1919년 3월 8일 이래 여러 차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8일의 첫 만세시위는 기독교계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준비되고 전개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의 1인으로 경상도 지역의 연락책임을 맡은 기독교계의 이갑성(李甲成)은 2월 28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600장을 수령하여, 그 중 200장을 세브란스의전 학생을 통해 3월 2일 대구 제1교회(남산정교회)의 이만집(李萬集)에게 전달하였다. 이만집·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은 서문(西門) 밖 시장의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에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약속하고 더욱 많은 동지 규합에 노력하였다. 정재순(鄭在淳)·정관순(鄭光淳) 등 기독교계 인사들과 계성학교 교사인 백남채(白南埰)·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 등이 합류하였다. 계성학교 교사 김영서·백남채·최상원·권의윤·최경학 등은 계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만세운동 참가를 권유하였다. 이때 기독교계 인물들로부터 만세운동 준비의 내용과 계획을 전달받고, 그 취지에 동의하여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약속하였다. 한편 대구의 학생들도 이미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허범(許範)·백기만(白基萬)·하윤실(河允實)·김수천(金洙千)·김재소(金在炤)·신현욱(申鉉旭)·박노일(朴魯日)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허범 등은 대구 시내 각 학교의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서문 밖 시장의 장날인 3월 8일을 만세운동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기독교계와 학생들의 이 같은 두 갈래 흐름은 만세운동 준비에 매진하는 과정에서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3월 8일 아침부터 대구 시내에는 도청의 정문을 비롯한 각처에 태극기와 함께 ‘독립만세’라고 적힌 전단이 붙었다. 3시가 되기 직전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200여 명이 이들을 가로막는 일제 기마헌병대와 격투를 벌이며 줄버드나무거리로 나타나자, 잠복하고 있던 계성학교 학생들이 합세하여 일제 기마헌병대를 뚫고 시장으로 들어왔다. 학생들은 시장의 쌀 가마니를 포개어 임시단(臨時壇)을 만든 후 이만집·김태련을 그 곳에 올려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주민들에게 배부하고, 태극기를 흔들기 시작하였다. 시장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1,000여 명의 주민, 학생들과 함께 시위 대열을 형성하고 도청과 동성로 등 대구 시내의 곳곳을 행진하며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가 달성군청 부근에 도착했을 때 일제는 대구 주둔 80연대를 출동시켰다. 일제의 군대는 시위대를 향해 5~6대의 기관총을 걸어 놓고, 착검(着劍)한 총을 들고 시위대를 겨누고 있었다. 이와 같은 무력 앞에서 학생 시위대가 이상 더 전진할 수 없어 그곳에 머무르게 되자, 일제 헌병과 경찰들은 시위대에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구타하고 검거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만집·김태련 등 150여 명과 함께 일제 헌병에게 붙잡혔다. 이후 일제 헌병대의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의 주도자 중 한 사람으로 파악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그해 12월 2일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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