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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득

鄭尙得

1886. 7. 1 ~ 1969.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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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정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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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포항(浦項)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포항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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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6년 7월 1일 경상북도 포항시(浦項市) 구룡포읍(九龍浦邑) 구룡포리에서 태어났다. 주소는 경북 영일군(迎日郡) 청하면(淸河面) 미남리(美南里, 현 포항시 북구 청하면)이었다. 본관은 초계(草溪), 이명으로는 정성욱(鄭成郁)이라고도 하였다. 1919년 당시 35살로 직업은 잡화상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등 일제침략 책동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사직 후 은둔하고 있던 정환직(鄭煥直)이 의병을 계획하고 아들 정용기를 불러 거의하게 하였다. 정용기는 1906년 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산남의병부대를 일으켰다. 의병부대는 영해(寧海)의 신돌석(申乭石)과 연락하며 청하읍 공격을 목표로 진군하던 중 1906년 4월 28일 정용기가 경주진위대에 체포되었다. 그 후 중군장 이한구(李韓久)가 이끌었으나 구심점을 잃고 해산하고 말았다. 1906년 9월 정용기가 풀려나자 1907년 4월 정용기·이한구·손영각(孫永珏) 등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재편성되었다. 이때 척후장(斥候將)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07년 7월경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정용기 의병부대는 서울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관동(關東)으로 북상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하였다. 의병부대는 북상하기 위해 청하·안동(安東)·의성(義城)·청송(靑松) 등지를 전전하였지만 일본군 수비대 병력이 대폭 증가되면서 길이 막혀 있었다. 척후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일본군에 붙잡혔으나 기지를 발휘하여 농민으로 위장해 풀려났다. 이후 1909년 민긍호(閔肯鎬)·김상태(金尙台) 의병부대에 다시 들어가 활동하였다. 이강년 의병부대의 중군장이었던 김상태는 이강년이 붙잡힌 뒤 독자적으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격전을 치렀다. 1911년 6월 경북 순흥(順興)에서 김상태가 붙잡히자 함께 활동하던 인사들과 은신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영일군 청하면에서는 3월 22일 덕성리(德城里) 장터에서 먼저 일어났다. 영일군 송라면 기독교교회 윤영복(尹永福)과 오용간(吳用干)이 주도한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장터 군중을 이끌었다. 무장한 일제 경찰의 출동으로 시위대는 해산되고 윤영복·오용간 등과 함께 붙잡혔다. 이후 재판에 회부되어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옥고를 겪은 후 1920년 3·1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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