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호
田在浩1883. 4. 20 ~ 1967. 8. 2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돌석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3년 4월 20일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 북면(北面) 부구리(富邱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담양(潭陽), 호는 화서(花西)이다. 다른 이름으로 전동호(田東浩)·전세호(田世浩)· 전동배(田東培) 등을 사용하였다. 고려 말 첨의평리겸진현관대제학(僉議評理兼進賢館大提學)을 역임한 회정(悔亭) 전자수(田子壽)의 셋째 아들 봉례공(奉禮公) 전진(田晉)이 울진에 정착하면서 그 후손들이 울진 각처에 세거하였다.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이에 반대하여 1905년 12월 7일 울진군 근남면(近南面) 수산(水山)의 김용욱(金容旭), 죽변면 (竹邊面) 봉평(鳳坪)의 전배근(田培根)과 최경호(崔慶鎬), 북면 고목(古木)의 장진수(張鎭洙) 등과 함께 흥부시장(興富市場)에 모여 창의를 논의하였다. 곧이어 영양(英陽)의 이현규(李鉉奎)와 이강년 휘하의 김현규(金顯奎)가 울진 불영사(佛影寺)에 들어와 1906년 2월 19일 창의하였으므로 김용욱을 비롯한 많은 울진 출신의 인사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6년 4월 6일 영해(寧海)에서 창의한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분진선봉장(分陣先鋒將)으로 중군장 김용욱, 중군 최경호, 소모 전배근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1907년 1월 2일 신돌석 부대 300~400명이 울진에 들어와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우편물을 소각하였는데, 이때 분진선봉장으로 울진군의 서문(西門)을 부수고 돌입하였다. 1907년 8월에는 신돌석 부대의 참모(參謀)로서 중군 최경호, 소모 전배근 등과 함께 평해군수 이명근(李命根)을 방문하여 포군(砲軍)과 군기(軍器)의 인도를 요청하였다. 이에 군수 이명근은 향회(鄕會)의 결정에 따라 관포군(官砲軍) 40명과 군자금(軍資金) 1천 냥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 후 울진으로 돌아와 장석태(張錫泰)·장진수(張鎭洙) 등과 함께 의병 200여 명을 휘하에 거느리고 울진 및 평해 관내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병 활동을 중지하고 귀향한 것으로 보인다. 귀향한 후 1907년 10월 주진수(朱鎭洙)가 설립한 매화리(梅花里)의 만흥학교(晩興學校)에 입학하여 측량학(測量學)을 배웠다. 『백운선생실록(白雲先生實錄)』의 「매화만흥학교설립 및 수학생 명단(梅花晩興學校設立及受學生名單)」에 보이는 ‘전동배(田東培)’는 개명한 이름이다. 또한 『폭도에 관한 편책』에서도 1908년 8월 28일 귀순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 울진지역 만세시위운동의 총참모로 항일활동을 이어나갔다. 만세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上海)에 세워지자 군자금 7〜8만원을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망명을 계획하였으나 원산에서 붙잡혀서 징역 9년 7월을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