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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學魯

學魯

1867. 10. 8 ~ 1933.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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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學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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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천(永川)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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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박동의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67년 10월 8일 경상북도 영천군(永川郡) 자양면(紫陽面) 성곡리(聖谷里) 속칭 토골에서 이정봉(李楨鳳)과 경주 김씨(慶州金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벽진(碧珍)이며, 자는 성숙(性叔)이고, 호는 후은(後隱)이다. 체력과 담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도량이 넓고 재주가 있었다. 또한 일찍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석학(碩學)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1908년 3월 박동의 의병부대에 들어간 이후 1909년까지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897년 통덕랑(通德郞) 영희전(永禧殿) 참봉(參奉)을 제수받고 벼슬길에 올랐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 체결과 1907년 고종(高宗) 강제 퇴위 등으로 일제의 국권 침탈이 노골화되자, 관직을 그만 두고 경남지방의 여러 지역을 돌며 뜻있는 동지들을 찾았다.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이후 여러 의병부대가 지리산 일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이때 도원수(都元帥) 윤수영(尹永壽義陣) 휘하의 박동의(朴東義) 의병부대에 합류하였고, 대장 아래 도선봉(都先鋒)으로 임명되었다. 박동의 의병부대는 후군장 장궁만(張弓滿), 중대장 황내청(黃乃靑), 좌선봉 이만영(李萬永), 중군장 양문칠(梁文七), 영솔장(領率將) 김경삼(金敬三), 후군장 유명국(柳明國) 등으로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경남 하동군(河東郡)과 산청군(山淸郡)을 중심으로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의병부대 예하의 부대장들이 14~35명 정도를 통솔할 때, 도선봉으로 하동지역을 담당하면서 34~35명의 의병을 이끌었다. 1908년 8월 18일 향도관(嚮導官) 서병희(徐炳熙)와 함께 병사 18명을 지휘하여 산청군 두량곡(斗量谷)에서 일본군 수비대에게 타격을 주었다. 같은 해 10월 17일 산청군 덕산(德山)에 주둔하던 박동의가 진주수비대(晋州守備隊)의 습격을 받고 붙잡혀 사망하자,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09년 2월에는 산청군 덕산에서 서병희와 함께 병사 11명을 이끌고 함안군 산외면(山外面, 현 가야읍) 방목동(放牧洞, 현 검암리·가야리 일대)의 일본인 집을 불태웠다. 그해 2월 20일에는 병사 29명을 이끌고 경남 합천(陜川)에 주둔한 일본군과 격전을 펼쳤다. 이후에도 함안군 군북(郡北)·칠원(漆原), 진주군 가좌(加佐), 고성군(固城郡) 개천(介川) 등의 지역에서 군자금 확보와 일본인 처단에 나섰고, 일본군 토벌대와도 항전하였다. 1909년 10월 함께 활동하던 서병희가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이끌고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사망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같은 해 11월까지 지리산과 가야산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재판에 넘겨져 징역 10년을 받아 옥고를 겪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후유증으로 고초를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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