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泰榮
泰榮1881. 4. 5 ~ 1958. 3.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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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1년 4월 5일 충청북도 제천군(堤川郡) 덕산면(德山面) 신현리(新峴里)에서 태어났다. 이인영(李麟榮)의 관동창의진(關東倡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인영은 경기 여주(驪州) 출신의 유학자로, 일찍이 1895년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斷髮令)이 선포되자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의병을 일으킨 바 있었다. 강원 춘천(春川)·양구(楊口) 일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는 등 활동하였으나, 1896년 고종이 선유문(宣諭文)을 내리자 이를 받들어 문경(聞慶)의 자택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907년 일제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것을 빌미로 광무황제(고종)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맺어 행정권, 관료임명권 등을 강탈했으며, 그 부속 밀약에 의거해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때 강원도 원주에서 거병한 이은찬(李殷瓚)과 이구재(李九載)는 해산군인 80여 명이 포함된 의병 500여 명을 이끌고 이인영을 찾아와 의병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인영은 이에 응하고 의진을 관동창의진이라 명명하였으며, 격문을 산포하여 인원을 모집하였다. 1907년 9월 관동창의진에 동참하였으며, 삼산대전투(三山大戰鬪)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12월 여러 도의 의병 부대를 통일하여 힘을 모으고 서울로 쳐들어가자는 이인영의 격문을 받은 각 도의 의병장들이 부대를 이끌고 경기 양주(楊州)에 집결하였다. 이에 전국 연합 의진인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 편성되었으며, 창의대장에는 이인영이 추대되었다. 13도창의군의 총 인원은 약 1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약 3천여 명이 근대적 무기로 무장하고 전문 군사훈련을 받은 해산군인 출신이었다. 13도창의군은 즉시 서울로 진격하였으며, 이때 중진군(中軍陣)에 배치되어 수십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자 진동장(鎭東將)에 임명되어 관동병(關東兵)들을 지휘하였다. 1908년 2월 이인영이 부친의 부고를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이후 군사력과 물자 부족, 일본군의 가혹한 탄압 등으로 인해 결국 13도창의군은 해산하고 각기의 연고지로 돌아가 개별적인 항쟁을 지속하였다. 1908년 4~9월 무렵 인제(麟蹄) 읍내에 격문을 보내고 인제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1910년 5월 무렵 약 25명의 인원으로 회양(淮陽)·양구·인제에서 활동하였으며, 그해 10월 무렵 다른 의병부대와 함께 영서지방에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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