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正九
正九1876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봉수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충청남도 목천군(木川郡) 갈전면(葛田面, 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출신이다. 일제 측 판결문에 따르면 1910년 당시 나이가 34세로, 1876년생으로 추정된다. 병천시장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명은 이재천(李在天)이다. 1909년 (음)4월 한봉수(韓鳳洙, 일명 한봉서) 의병부대에 참여한 이후 친일파 처단과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였고 협약체결 이후 대한제국의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자 진위대(鎭衛隊) 상등병 출신인 한봉수는 “국민이 특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전횡(專橫)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한국인의 곤란함과 위축됨은 날이 갈수록 극에 다다르고 있다. 황실의 안태(安泰)를 간직하고 국민을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일본인을 나라 밖으로 배척하고 현 정부를 타파하는 것이니,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의병을 모집하고 군용금을 징발해야 한다”고 통탄하며, 해산 군인 100여 명을 모아 충북 청주(淸州)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부대의 명칭을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라고 하였다. 이러한 목적에 찬동하여 한봉수 의병부대에 가담한 후, 충북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음)4월에는 일찍이 의병의 소재를 일본군 수비대에 밀고하여 의병 2명을 희생시킨 원수를 갚기 위해 청주군 백자동(百子洞, 현 천안시 수신면 백자리) 이장 박씨를 처단하였다. 같은 해 (음)5월에는 김명심(金明心)·권성삼(權聖三)·임석근(林石根)·한춘삼(韓春三)·안명선(安明先)·김서첨(金瑞添)·이사중(李士仲)·정춘서(鄭春西) 등과 함께 충북 괴산군(槐山郡) 서면(西面, 현 청주시 오창면과 북이면 인근) 사치(沙峙, 모래재)에서 우편물을 호송하던 일본군 수비대 2명을 처단하고, 총과 탄약 등의 무기와 군수품을 확보하였다. (음)8월 15일에는 한때 의병항쟁에 참여했던 마을 주민의 제보로 청주 헌병분견소 소속 밀정 박내승(朴來升)을 처단하였다. 또한 (음)10월부터는 청주 일대를 돌며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그러던 중 식량과 무기가 부족해지고 일본군의 탄압이 더욱 강해지자, 의병장 한봉수와는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목천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송창운(宋昌云)과 함께 갈전면에 위치한 홍원강(洪元江)의 집에서 은신하였다. 이때 갈전면 상석항리(上石項里, 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리)의 이종칠(李種七)이 찾아와 협의한 끝에 세 사람이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음)12월 청주군 북강외이면(北江外二面) 양청리(陽靑里, 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양청리)와 갈전면 소근리(所近里)·삼성리(三星里, 현 병천면 봉항리) 등의 지역을 이동하면서 여러차례 군자금을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헌병에게 붙잡혔다. 이로 인해 1910년 3월 9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종신 유(流)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4월 5일 경성공소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정윤⋮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