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원
張聖源1897. 1. 16 ~ 1956. 11.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괴산군 청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7년 1월 16일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청안면(淸安面) 효근리(孝根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30일 청안면 청안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괴산군 청안면의 만세운동은 3월 19일 일어난 괴산면(槐山面) 만세시위의 영향을 받았다. 3월 19일 괴산면 만세시위를 펼치던 시위대가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 교류하던 김수백(金壽伯)·이태갑(李泰甲)·박순옥(朴巡玉)·함재원(咸在元)·신강면(辛康勉) 등과 의기투합해 청안면에서의 만세시위를 결의하였다. 이들과 협의를 통해 괴산군 남부 4개 면의 주민들이 모이는 청안장터의 장날인 3월 30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만세시위 당일 배포할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문을 등사하였다.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지역별로 담장자를 선정할 때 사리면(沙梨面)을 맡기로 한 후, 직접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30일 김수백·이태갑·장성원·박순옥·함재원 등과 함께 청안장터로 이동하였다. 오후 1시경 장터의 외곽에서 사전연락을 받고 모인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장터로 들어갔다. 오후 3시 30분경 주도자들과 함께 청안장터 한복판으로 나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태갑이 큰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다수의 주민들이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김수백·이태갑 등과 시위대를 이끌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였다. 그러자 만세시위에 공감한 주민들이 동참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2,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접수한 일제 경찰은 곧바로 출동해 강압적으로 해산을 요구하면서 시위대의 선두에 있던 유웅렬(劉雄烈) 등 7명을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김수백·이태갑 등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연행자를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로 가서 “어째서 죄없는 사람들을 너희가 체포하는가? 즉각 석방하라”고 외치면서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은 석방 요구에 불응하면서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였고, 김명진(金明鎭)·임수근(林水根)·김춘경(金春京) 등을 추가로 연행하였다. 김수백이 “주재소 안으로 쳐들어가자”고 외쳤고, 이에 호응해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며 공격을 독려하였다. 그리고 시위대가 함께 돌을 던지며 주재소로 진입해 유리창과 각종 기구 등을 파괴하였다. 이에 놀란 일제 경찰이 다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해 7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일제 경찰의 강경 대응으로 시위대가 일시적으로 해산하기도 하였지만, 남아있던 수백 명은 더욱 분노하며 계속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후 함재원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해 일제 경찰의 지원 병력 요청을 차단하기 위해 우편소를 공격하고 전화선을 차단하였다. 이후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7월 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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