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용
張相用1898. 4. 3 ~ 1957. 9. 2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1919년 강화군 부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98년 4월 3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길상면(吉祥面) 길직리(吉稷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부내면(府內面) 읍내 시장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강화군 부내면 읍내 장터에서는 3월 18일 약 10,0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만세시위는 길상면 온수리(溫水里)의 유봉진(劉鳳鎭), 선두리의 황도문(黃道文)·황유부(黃有富)·염성오(廉成五)·장윤백(張允伯) 등 감리교계 기독교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3월 1일 이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강화군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11일 유봉진·황동문·염성오·장윤백 등은 황유부의 집에 모여 거사일을 부내면 읍내 장날인 3월 18일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만세시위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어서 주민들에게 배포할 「독립선언문」, 「강화 인민에게」, 『국민회보』 등을 인쇄하고, 주민들과 함께 부를 「독립가」를 만들었다. 이때 길상면의 기독교 인사들로부터 만세시위에 대해 사전에 연락을 받고,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면서 참여를 결정하였다. 거사일인 3월 18일 태극기를 품속에 간직하고 읍내 장터로 향하였다. 읍내의 윗 장터와 아랫 장터로 사전 연락을 통해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은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터에 모인 사람들의 규모는 10,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오후 2시경 유희철(劉熙哲)·황일남(黃日男)·황윤실(黃允實) 등의 결사대원들이 먼저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선도하였다. 유희철 등의 선창에 장터에 나온 주민들과 함께 일제히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서 시위대는 유봉진 등의 지휘에 따라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장터에서 강화향교(江華鄕校)를 거쳐 군청으로 이동하였다. 장터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강화경찰서의 일제 경찰은 시위 진압을 위해 김덕찬(金德贊)·염이선(廉履善)·유재면(柳在冕)·김순덕(金順德) 등 5명의 한국인 순사보를 출동시켰다. 이때 시위대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주민들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던 유희철·조기신(趙基信) 등이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시위대는 ‘군청과 경찰서를 압박하여 연행된 사람들을 즉시 석방할 것’과 ‘군청·경찰서의 직원들도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 등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자 군수 이봉종(李鳳鍾)이 대규모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고, 기세에 눌린 일제 경찰은 유희철·조기신 등을 풀어주었다. 이후 유봉진 등의 지휘에 따라 강화 읍내 곳곳을 행진하면서 밤늦게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시위대와 함께 자진 해산하였다. 하지만 이날의 만세시위 이후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참여자 색출 과정에서 붙잡혔다.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소요죄로 태(笞) 90도(度)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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