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순
張明淳1899. 6. 15 ~ 1950. 10.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강화군 부내면 읍내(3.18) 만세운동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99년 6월 15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생활하였다.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촉발한 만세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강화군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18일 강화도(江華島)의 강화읍(江華邑) 장터에서 약 10,000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만세운동은 길상면 온수리(溫水里)의 유봉진(劉鳳鎭), 선두리의 황도문(黃道文)·황유부(黃有富)·염성오(廉成五)·장윤백(張允伯) 등 감리교계의 기독교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유봉진을 중심으로 3월 11일 황유부의 집에 모여 강화읍 장터의 장날인 3월 18일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결정하고, 주민들에게 배포할 독립선언서, 「강화 인민에게」, 『국민회보』 등의 인쇄 및 만세시위에서 주민들과 함께 부를 「독립가」를 만드는 등 구체적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7일 교동면(喬桐面) 지석리(芝石里)에 위치한 장윤백(張允伯) 집에서 같은 기독교도들인 황일남(黃日男)·황윤실(黃允實)·유희철(劉熙哲)·조상문(曺尙文) 등과 회합하여 장윤백으로부터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았다. 그 자리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만세시위 때, 각자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을 지휘, 선동하자며 결사대원으로 나설 것”을 다짐하였다. 이날 밤 이들과 함께 만세시위에서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일인 3월 18일, 지난 밤 제작한 태극기를 휴대하고, 유희철 등과 함께 읍내 장터로 향했다. 강화읍의 윗 장터, 아랫 장터로 사전 연락을 통해 만세운동에 공감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려는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장터에 모인 주민들의 숫자는 10,000여 명의 규모였다. 오후 2시경 유희철 등의 결사대원들과 함께 가장 먼저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선도하였다. 이에 주민들도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쳐 호응하면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백마를 타고 호령하는 유봉진 등의 지휘에 따라 만세시위대는 장터에서 강화향교(江華鄕校)를 거쳐 군청으로 진출하였다. 강화경찰서의 일제 경찰은 만세시위의 진압을 위해 5명의 조선인 순사보를 출동시켰다. 이들은 고압적인 자세로 만세시위의 해산을 명령하며, 시위대의 선두에서 결사대원으로 활동하던 유희철과 조기신(趙基信) 등을 체포하여 연행하였다. 하지만 이미 10,000여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는 강화도의 일제 경찰들이 진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대규모 만세시위대의 요구에 의해 군수 이봉종(李鳳鍾)은 순순히 ‘독립만세’를 외쳤고, 일제 경찰은 결국 유희철 등 만세시위에 초기에 체포한 주도자들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강화읍 장터 시위는 밤늦게까지 계속되다가 자진 해산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 이후 강화도로 출동한 일제 경찰과 군대의 대대적인 만세시위 참여자 조사, 색출 과정에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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