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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영

張萬永

1893. 4. 17 ~ 1948.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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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장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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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구성(龜城)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구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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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구성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3년 4월 17일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방현면(方峴面) 변산동(辨山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4월 구성군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중심으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평북 구성군에서는 경성민회의 인물과 접촉한 최예락(崔禮洛)이 가장 먼저 남시(南市)에서 주위 동료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최예락은 선천군 출신 인물인 김 아무개에게 독립선언서와 주의서를 각각 500장씩 받았고, 만세시위 때 사용할 태극기와 독립기 문양 또한 전수받았다. 이를 동료인 최성진(崔成珍)·양인항(梁仁恒) 등의 주위 인물과 나누고, 시위 현장에서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만세를 외치고자 하였다. 시위 당일 남시 시장 중앙에 태극기를 높이 걸고, 준비한 독립기와 선언서, 주의서를 시장에 모인 군중에 배포하였다. 시위대는 점차 규모가 커져 약 1,000명에 달하였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한 헌병대와 충돌하였다. 일제는 이 과정에서 최예락 등 주도 인물들을 체포하였다. 3월 11일 남시에서 또다시 대규모로 만세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약 400명의 시위대가 헌병주재소로 행진하였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대에 발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15명이 붙잡혔다. 구성군에서의 만세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3월 31일에 남시에서는 또다시 대규모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남시에서의 시위는 전날에 이어 계속된 것으로, 가장 큰 규모인 5,000여 명이 참여한 대대적인 시위였다. 일제 측 기록에 의하면 이날 시위 군중이 손에 낫이나 도끼 등의 흉기를 들고 헌병주재소를 포위하였으며, 헌병을 폭행하는 등의 과격한 행위를 벌였다고 한다. 이는 시위대의 폭력성을 과장하여 헌병대가 발포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과장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날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 날은 남시 장날로, 시위대가 헌병주재소를 포위하며 행진하였고, 이러한 시위대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헌병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7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5명이 체포되었다. 3월 31일에는 사기면 신시에서도 1,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4월 1일에는 남시, 신시, 읍내 등 구성군 전역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여 일제 측과 충돌하게 되었으며, 사상자 및 체포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3월과 4월 초에 걸친 구성군 남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남시에서 격렬하게 벌어진 시위에서 다른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치고,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주재소 기물을 파손하는 등 시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5일 평양지방법원 정주지청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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