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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중재

任重宰

1879. 6. 11 ~ 1936.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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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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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靑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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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관련 사건

  • ·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4) 1879년 6월 11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백곡리(栢谷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정산면 광생리(光生里)로 이주하여 거주하였다. 1919년 4월 5일 청양군 정산면 정산시장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정산면 정산시장 만세시위는 백곡리의 유림인 홍범섭(洪梵燮)·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임의재 등은 홍범섭이 서울에서 구해 온 독립선언서를 함께 읽은 후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정산시장 장날인 4월 5일을 거사일로 정하여 준비하였다. 이때 임의재·임철재(任哲宰) 등으로부터 연락받고, 4월 5일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서정리(西亭里)의 정산시장으로 갔다. 오후 3시경부터 홍범섭 등이 시장의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즉시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시장의 북쪽에 대기하고 있던 일제 헌병의 시위 진압에 맞서 더욱 크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항거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홍범섭 등 30여 명이 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분노한 군중이 만세시위에 동참하면서 시위의 규모는 7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시위 군중과 함께 헌병분견소로 달려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은 해산을 강요하며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는데, 이때 시위대의 선두에서 시위를 이끌던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 권흥규(權興圭)가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날의 시위는 황망함 속에 분노를 삭이면서 해산하였으나, 다음 날인 4월 6일 아침 사망한 권흥규의 시신을 인수하여 고인의 자택으로 가는 운구에 참여하였다. 운구행렬의 선두에는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고 쓴 명정(銘旌)을 앞세웠다. 운구 소식을 듣고 목면 안심리(安心里)로 가는 길목의 각 마을에서도 상여를 대고 또 곳곳에서 노제를 올리면서 주민들이 속속 운구행렬에 동참해 왔다. 통곡하며 행진하던 운구행렬 속에서 어느 순간 ‘조선독립만세’의 절규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점차 운구행렬은 만세시위로 전환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운구행렬의 규모는 확대되었다. 이에 일제는 정산과 공주(公州)의 헌병을 운구행렬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였다. 이 결과 전날에 이어 권흥규의 조카 최윤안(崔胤安)과 명정을 쓴 권영진(權寧鎭) 등이 희생되었고, 다수의 부상자가 나오면서 대오는 해산되었다. 이후 일제 헌병의 만세시위자 색출 과정에서 붙잡혀 청양헌병분견소에 투옥되었다. 1919년 4월 26일 즉결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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