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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良默

默

1882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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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林良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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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신천(信川)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신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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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신천군 신천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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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2)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신천면(信川面) 무정리(武井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38세로, 1882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7일 신천군 신천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신천면 만세시위는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19년 3월 24일 사직리(社稷里)에 거주하는 곽영선(郭永善), 무정리(武井里)에 사는 곽현종(郭賢鍾), 척서리(滌暑里)에 거주하는 백영서(白永瑞) 등이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또한 무정리에 사는 이봉서(李鳳瑞)는 3월 26일 사직리 개신교 교회 조사(助事) 김형식(金亨植)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를 김일환(金日煥) 등과 함께 약 280장을 인쇄하였다. 3월 27일 오후 1시경 개신교인들은 신천면 읍내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이미 제작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였다. 이때 시작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200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헌병의 무력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10~30명 단위로 몰려다니면서 밤 10시까지 산발적으로 만세시위를 이어나갔다. 3월 28일에는 전날 일제 헌병의 강제 진압과 시위대의 연행 과정에 분노한 개신교인이 중심이 된 100여 명의 시위대는 곤봉 등을 들고 일제 헌병과 대치하였다.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대 2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일로 일제 군경에 붙잡혔다. 이른바 출판법,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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