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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孝德

孝德

1895. 1. 24 ~ 1978.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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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孝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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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용강(龍岡)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용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양정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95년 1월 24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삼화면(三和面) 율하리(栗下里)에서 태어났다. 종교는 기독교이다. 1919년 무렵에는 평남 중화군(中和郡) 양정면(楊井面) 석양리(石陽里)에 위치한 사립양무학교(私立揚武學校)에서 교사(敎師)로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1일과 3월 2일에 발생한 평남 중화군 양정면의 만세시위에 학생들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1918년 무렵부터 평남 중화군의 사립양무학교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평소에도 조선의 독립을 강하게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양무학교의 교장(校長) 김준(金濬)이 평양을 오가며 3월 1일로 예정된 독립선언식의 소식을 듣고 와서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기뻐하며 시위에 참석할 뜻을 밝히고 태극기를 그리는 등 시위 준비에 앞장섰다. 3월 1일, 양무학교 교사 문창호(文昌浩)·최응규(崔鷹奎)를 비롯하여 양무학교 학생들이 모두 학교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한 후, 독립 만세를 외치며 헌병지서를 향해 행진하였다. 헌병지서에 도착한 이후 헌병들과 몸싸움을 한 후 해산하였다. 이어 다음날인 3월 2일에도 예배 이후 시내로 나아가며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날은 시내의 사람들이 합류하여 그 수가 더욱 많아졌고, 일제 헌병 또한 시위대를 더욱 강하게 진압하려 하였다. 이에 양무학교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 상당수가 붙잡혔다. 이때 몸을 피하는 데 성공했으나 헌병들이 자신을 잡기 위하여 온 마을을 들쑤시며 다니자, 다른 사람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3월 3일 자수하였다. 그리고 중화경찰서로 옮겨져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이 일로 평양지방법원의 판결을 거쳐, 1919년 7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1919년 9월 27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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