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晦根
晦根1884. 6. 28 ~ 1944. 2. 1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둔남면 오수리 장터 만세시위
- · 민족의식 고취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4년 6월 28일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지사면(只沙面) 안하리(㕍下里)에서 태어났다. 고향 마을에서 농업(農業)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둔남면(屯南面) 오수리(獒樹里)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오수리 장터 만세시위는 마을의 유지였던 이기송(李起松)과 오병용(吳秉鎔) 등의 주도로 오후 2시 시작되었다. 장터에 모였던 마을 사람들이 만세시위에 호응하면서, 시위 군중의 수는 금세 8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천도교도(天道敎徒)와 기독교도(基督敎徒)가 주축이 된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행진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인 순사보(巡査補)인 고택기(高宅基)가 이기송 등 주도자들을 강제로 붙잡아서 주재소(駐在所)로 연행하였다. 이에 오병용, 김일봉(金一奉) 을 비롯하여 약 200명의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고, 이에 일본인 순사 무라이(村井邑次)가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크게 고무된 시위대는 다시 장터로 향하며 계속 만세시위를 이어갔고, 그 숫자는 약 2,000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며, 면사무소에서는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강요하였다. 이때 다른 동지들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주재소의 유치장 문을 부수고 김영필(金永弼) 등을 풀어주었다. 이때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며 위협하였으나 시위대는 그의 총을 빼앗고, 고택기를 주재소의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고 가 독립만세를 외치라고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증원된 경찰 병력이 시위대를 무력으로 강제로 해산하면서 시위는 중단되었고, 이후 일제의 검속 과정에서 붙잡혔다. 1919년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8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오히려 형량이 늘어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다시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그 해 10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43년에는 부친(父親)인 이한룡(李漢龍)이 남긴 한문(漢文) 유고(遺稿)를 모아 아버지의 호를 딴 『당천집(唐川集)』이라는 제목의 문집(文集)으로 발간하여 이를 배포하다가 일제 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이 문집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비롯해 1910년 당시 일제의 한국 병합의 부당함을 개탄하는 내용이 실려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1943년 1월 25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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