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洪俊
洪俊1893. 4. 9 ~ 1969. 9. 2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관련 사건
- · 1919년 울산군 하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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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5) 1893년 4월 9일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하상면(下廂面) 서리(西里, 현 울산광역시 중구 서동)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당시 26세의 나이로, 4월 4일과 5일에 일어난 울산 병영(兵營)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병영 장터 만세운동은 한명조(韓命祚)·이영호(李永浩)가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비롯되었다. 병영청년회 회원으로서 이현우(李鉉禹)·이문조(李文祚)·이종욱(李鍾旭)·박영하(朴永夏)·이종근(李鍾根)·양석룡(楊錫龍) 등과 모임을 거듭하였고, 거사일을 병영 장날인 4월 4일로 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박영하 집에서 독립선언서 약 200장을 인쇄하였고, 권작지(權作支)의 집에서 태극기 500여 장을 제작하였다. 아울러 종이로 ‘대한민국독립만세(大韓民國獨立萬歲)’, 명주로 ‘대한독립만세’라고 써서 큰 깃발을 만들었다. 또한 손가락을 깨물고 ‘결사보국(決死報國)’이라는 혈서를 써서 일심동체의 혈맹(血盟)임을 확인하였다. 4월 4일 오전 9시, 청년회 회원들과 준비 물품을 품고 일신학교(日新學校) 운동장으로 갔다. 오전 11시 40분, 축구공을 높이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집결한 학생들과 함께 교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어서 준비해 간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서리·동리(東里)·남외리(南外里)·산전리(山前里)를 돌면서 시위대는 수백 명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일제 경찰의 진압으로 깃발을 들었던 양석룡은 무수히 구타당하였고, 유혈 충돌을 겪은 끝에 10여 명이 검거되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다음 날인 4월 5일 오후 3시, 체포를 면한 주도 인사들과 다시 일신학교에 집결하였다. 이번에는 이문조가 대형 깃발을 들었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성 둑과 큰길을 따라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경찰주재소에 도착하여 둘러싸고 돌을 던지며 주도 인사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관과 수비대는 시위 군중에 발포하였고, 문성초(文星超)를 포함한 4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또한 격렬한 육박전 끝에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40여 명의 주도 인사와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부산감옥에서 옥고를 겪었고 같은 해 10월 22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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