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弘植
弘植1896. 3. 28 ~ 1963. 10.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관련 사건
- · 1919년 하동군 진교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4) 1896년 3월 28일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진교면(辰橋面) 진교리(辰橋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9~30일 하동군 진교면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정재운(鄭在雲)·정재백(鄭在伯)·이원태(李源泰) 등과 함께 진교리 시장의 장날인 3월 29일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태극기를 직접 제작하는 등 만세운동을 위해 철저한 사전준비를 하였다. 3월 29일 정오 진교리 시장에 700여 명의 주민이 모이자 정재운·정재백·이원태 등과 함께 미리 숨겨 간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 준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주민들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고, 이들과 함께 장터를 누비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진교리 장터시위로 만세운동의 기운이 크게 고조되자 시위 군중을 이끌고 진교경찰관주재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진교경찰관주재소 앞에 도착해서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자 주재소의 경찰들이 총검을 들고 나와 주도자들을 검거하여 진교경찰관주재소로 끌고 갔다. 이에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를 포위한 후 검거한 주도자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진교경찰관주재소가 위와 같은 요구를 무시하자 주도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진교경찰관주재소로 쇄도하기 시작하였다. 진교경찰관주재소의 지원 요청으로 도착한 하동경찰서의 경찰들이 무차별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하자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3월 30일 오후 5시경 전날 붙잡힌 주도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을 규합하는 데 힘을 쏟은 결과 약 700명의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시위 군중이 모이자 선두에서 이들을 이끌고 진교경찰관주재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진교경찰관주재소에 도착해서는 전날 검거한 주도자 5명을 즉각 석방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진교경찰관주재소는 이에 불응한 채 하동경찰서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다. 진교경찰관주재소의 지원 요청을 받고 출동한 하동경찰서의 경찰들과 일본군 보병대는 총검을 들고 강제로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시작하였다. 일제 경찰과 보병대의 공격을 당해 낼 수 없었던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붙잡혔다. 1919년 5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후 상고를 포기하여 5월 31일 진주감옥에 수감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