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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鎬俊

鎬俊

1894. 11. 10 ~ 1956.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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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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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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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3)

관련 사건

  • · 예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3) 1894년 11월 10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도산면(陶山面) 토계동(土溪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이호준(李鎬駿)을 썼다. 1919년 안동군 예안면(禮安面)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7일 예안면 만세시위는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이 이시교(李時敎)·이중원(李中元)·이남호(李南鎬) 등과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만나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며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조수인(趙修仁)·조방인(趙邦仁) 등의 유림과 신응한(申應漢)·민태규(閔泰圭) 등의 기독교도들도 17일 예안읍 장날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거사 당일 오후 3시 30분 무렵 장터에서 선상산(宣城山)에서 들려온 만세소리를 들었다. 이어서 장터에서도 100여 명의 시위대가 뛰어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다.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대를 본 순간 망설임 없이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 곳곳을 행진하였다. 유림과 기독교도들의 합세와 장꾼과 주민들의 참여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만세시위의 열기는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세를 몰아 시위대와 함께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동봉(李東鳳)이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이를 본 일제 경찰이 수비대를 파견하여 주도자 등 15명을 체포하면서 시위대가 흩어졌다. 해산했던 군중은 당일 오후 6시경 모여 또 다시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1,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행진하면서 ‘구속자 석방’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주재소에 이른 시위대는 저지하는 일제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벌이며 저항하였고, 일제는 수비대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군중을 해산시켜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수비대의 발포로 시위대는 흩어지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25명의 동료와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3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즉시 항소하였으나, 그해 4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상고하며 “조국의 독립을 축하하여 만세를 부른 것 일뿐, 이것은 범죄행위가 되지 않기 때문에 무죄”라고 주장하였으나, 같은 해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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