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學奉
學奉1882. 1. 15 ~ 1919. 4.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4월 9일 양양군 기사문리(其士門里)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82년 1월 15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현북면(縣北面) 명지리(明池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9일 양양군 기사문리(其士門里)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현장에서 희생되었다. ‘기사문운동’으로도 불리는 이 만세운동은 현북면의 기독교인과 유학자가 손을 잡고 시위를 계획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상광정리(上光丁里) 감리교인 오세옥(吳世玉)과 이응렬(李應烈)이 나섰고, 유학자 측에서는 원일전리(元日田里)에 사는 박규병(朴奎秉)·박원병(朴元秉) 형제가 나서서 손을 잡았다. 여기에 현북면 유지 중광정리(中光丁里)의 임병익(林秉翼)과 오정현(吳鼎鉉)이 합세하였고, 상광정리의 김익렬(金益烈), 중광정리 김우근(金禹根), 명지리의 권광식(權廣植), 대치리(大峙里)의 김종성(金鐘聲) 등 현북면 구장(區長)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4월 9일 양양읍에 장이 설 때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는데, 박원병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있다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구금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 소식에 박원병의 형 박규병·박용규(朴容圭)가 장리(獐里)의 이성윤(李聖允)과 함께 4월 7일 임천리(林泉里)와 용천리(龍泉里)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박원병 석방을 요구하면서 만세시위를 펼친 후 붙잡혔다. 처음 만세시위를 계획했던 주도자들이 체포되었지만, 4월 9일로 예정된 만세운동은 그대로 추진되었다. 만세운동이 예정대로 추진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응렬과 포수(砲手) 김종대(金鐘大)가 사태를 파악하며 다른 주도자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데다가 현북면 구장들이 적극적으로 주민 동원에 힘을 쏟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기사문리 마을 구장 권병식으로부터 시위계획을 듣고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거사 당일인 4월 9일 아침 주민들과 함께 이웃 마을 하광정리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면사무소 앞에는 만세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현북면의 여러 마을에서 온 주민들로 가득 찼다. 군중과 제일 먼저 면장을 찾아 나섰지만, 면장과 면서기·면직원 모두 숨어버리고 없었다. 군중과 면사무소 주변 광장에서 구장들이 나누어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펼쳤다. 이어서 예정했던 대로 양양읍 장터로 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읍내에 병력을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에 계획을 바꾸어 기사문리에 있는 경찰주재소로 향하였다. 선두에는 옥양목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를 든 구장들이 섰고, 그 뒤에서 군중과 같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고개를 넘어 주재소 앞에 이르렀을 때, 일제 군경이 이미 총을 소지한 채 주재소 옆 개울 언덕에 배치되어 있었다. 일제 경찰들은 전날 강릉에서 파견된 지원부대와 협력해 주재소 전방 다리 부근에서 시위대를 향하여 총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시위대가 주재소로 진입하려고 할 때 순사 이홍근(李弘根)이 나와서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선두에 있던 사람들은 이홍근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로 나아갔다. 이때 총소리가 울려 펴졌다. 피할 사이도 없이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외 전원거(全元擧) 등 9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또한 이종남(李鐘南) 등 마을 주민 20여 명도 부상을 입으며 큰 참사가 벌어졌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진 총격에 군중은 흩어졌고, 부상을 입지 않은 주민들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수습하면서 돌아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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