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泰榮
泰榮1888. 4. 17 ~ 1933. 7.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 원곡면
- · 양성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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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8년 4월 17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현 안성시)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중백(仲伯)이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의 연합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오후 같은 동네의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이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자, 마을 사람 200여 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면사무소 앞에서 원곡면 각 동리에서 모인 1,00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 주도자들이 면사무소 직원을 면사무소 밖으로 끌어내 태극기를 쥐어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만들자, 고무된 참여자들과 함께 경찰주재소, 우편소 등이 위치한 양성면으로 향하였다. 시위대가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성은고개 정상에 도착했을 때, 주도자들은 행진을 멈추고 집회를 열고 연설하였다. “한국은 이미 독립했다. 이제 일제의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등은 필요 없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지금부터 양성으로 가서 주재소 및 우편소, 그 외 일본인의 집을 불태우자”는 내용이었다. 연설에 찬동한 시위대와 함께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되는대로 챙겨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양성면 경찰주재소에 도착하여, 밤 9시 경부터 만세시위를 벌이고 있던 양성면 주민 수백 명과 합세하였다. 2,000여 명으로 확대된 시위대와 함께 먼저 경찰주재소를 공격하였다. 돌을 던져 건물을 부수고, 경찰들이 도주하자 건물에 불을 붙이고 집기를 들고 나와 불 속에 던졌다. 주재소가 전소되는 사이, 우편소로 향하였다. 전신주의 밑동에 불을 붙여 넘어뜨리고, 우편소에 들어가 책상 등 집기를 들고 나와 모두 태웠다. 이후 양성면사무소로 행진하여 유리문과 기물 등을 파손시켰고, 마지막으로 양성면에 살던 일본인 잡화상 도자토 도요테(外里與手)의 상점과 고리대금업자 다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집을 습격해 가구와 물건들을 소각하였다. 이튿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이어진 시위를 마치고, 다시 원곡면으로 돌아와 원곡면사무소를 부수고 나머지 시위대와는 새벽 4시 경 해산하였다. 1919년 4월 3일 시위 참여자 색출을 위해 파견된 조선주차군 제79연대 소속 30여 명의 군인에 의해 체포되어 안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후 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에 의해 ‘내란죄’의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1년 가까이 재판이 지연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 의해 만세운동은 “소요죄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라는 판결을 받아,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었다.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본 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이 결정되어, 결국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 방화의 혐의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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