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仲植
仲植1880. 8. 7 ~ 1942. 12.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1919년 영덕군 영해면
- · 병곡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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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2) 1880년 8월 7일 경상북도 영해군(寧海郡) 묘곡면(畝谷面) 묘곡동(畝谷洞, 현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이중식(李中植)을 썼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18일과 19일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과 병곡면(柄谷面)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영해면 지역의 만세시위는 3월 12일부터 계획되었다.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교회의 조사(助事)인 김세영(金世榮)은 3월 초순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가던 중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접하였다. 평양(平壤)행을 포기하고 영덕으로 돌아와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을 만나 영덕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논의였다. 권태원은 3월 15일에 병곡면 송천동(松川洞)교회의 조사인 정규하(丁奎河)를 만나 김세영의 계획을 전하면서 시위를 협의하였고, 권씨 일가를 비롯해 와 남(南)가, 백(白)가, 이(李)가, 박(朴)가 등 지역 유력가문에 협조를 요청하였다. 정규하는 교회의 신도들에게 만세시위의 취지를 전달하고 동참을 권하였으며 창수(蒼水) 방면의 교인들에게도 사실을 알리면서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이즈음 정규하의 권유로 영덕 성내동(城內洞) 시장에서 열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형 이상화(李祥和)와 거주지 마을 사람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18일에 성내동시장으로 가서 정규하 및 박희락(朴羲洛)의 선창에 따라 군중 2,0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영해보통학교 주변을 돌며 행진하였다. 영덕에서 시작된 시위는 18일 2시 병곡면까지 진출하였으며 연도의 시민들이 합류하여 병곡주재소에 이르러서는 400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3월 19일에는 창수면에서 영해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하던 시위대가 창수경찰관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하였는데 200명~400명 규모의 시위대가 주재소를 장악하였다. 영해의 시위는 19일까지 이어졌는데 같은 날 포항(浦項)과 대구(大邱)에서부터 진압을 위한 일제의 헌병대와 군대가 증파되었고 이로 인해 만세시위는 끝이 났다. 이러한 시위 참여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 기물손괴죄, 공문서훼기, 상해죄 등을 이유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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