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中珷
中珷1881. 5. 20 ~ 1957. 11. 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동군 예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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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1년 5월 20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도산면(陶山面) 의촌동(宣村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37세인 1919년 3월 17일 안동군 예안면(禮安面)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은 이광호(李洸鎬)·이시교(李時敎)·신응두(申應斗) 등과 모여 3월 17일 예안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주도 인물들은 면사무소 숙직실에 모여 만세운동에 쓸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한편, 시위에 참여할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운동 제의를 받았는데 민족의 독립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주저없이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과 별도로 조수인(趙修仁)을 주축으로 한 안동군 유림과 예안 만촌교회 기독교도들도 각각 17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거사 당일인 17일, 비밀리에 예안면 장터로 향하였다. 주도자들과 약속 장소에 이르러 만세시위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오후 3시 30분 선성산(宣城山)에서 만세 함성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주도자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장터 중앙으로 달려 나갔다. 1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고, 유림과 기독교도들도 합세하면서 만세시위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다. 만세시위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자 일본 경찰은 수비대를 동원하여 군중을 포위하고 해산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시위대는 이동봉(李東鳳)의 인솔하에 경찰관주재소로 향하며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이를 본 일제 경찰은 군중에게 무력을 행사하면서 주도자 등 15명을 현장에서 체포하였다. 주도 인물들이 체포되자 군중도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해산한 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장터에 모여 구속된 사람들의 탈환을 위한 방법을 논의하였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다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오후 6시 이시교·안병극(安炳極) 등이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1,5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 앞에서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진입을 시도하였다. 앞을 가로막는 수비병을 밀어내고 주재소 안에 들어가 돌과 기왓장으로 주재소 유리창과 문을 부수며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 경찰은 더 많은 수비대를 파견하여 군중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이 과정에서 여러 명의 부상자가 생기고 이때 다른 24명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3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그 해 4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는데 상고 취지문에서 “본인은 조선 민족의 구성원으로 독립을 원하여 하늘에 호소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인도(人道)상의 지극히 정당한 도리로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만세를 부른 사람들을 체포하고 구타한 것은 법률의 불공평이며 집행자의 수치”라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하면서 징역 1년이 확정되었다. 1920년 4월 28일 경성감옥에 수감 중 영친왕(英親王) 결혼을 기념한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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