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俊石
俊石1896. 5. 7 ~ 1955. 3. 1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일군 청하면 덕성장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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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6년 5월 7일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송라면(松羅面) 대전리(大田里, 현 포항시 북구 송라면 대전리)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으로 자신의 마을 예수교 교회 집사(執事)를 지냈다. 1919년 24세의 나이에 3월 22일 청하면(淸河面) 덕성리(德城里)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개신교인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덕성리 장터 만세시위는 영일군에서 세 번째로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3월 10일 포항면(浦項面) 북본정(北本町, 현 포항시 북구 중앙로 일대) 영흥학교 학생 60여 명이 일으킨 만세운동이 발단이 되었다. 덕성리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같은 교회 장로파 영수(領袖)인 윤영복(尹永福)이었다. 윤영복은 신문을 통하여 서울과 평양(平壤)·대구(大邱) 등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알고 자신의 마을에서 만세운동을 펼칠 것을 계획하였다. 3월 18일 윤영복은 덕성리 예수교 교회 영수 오용간(吳用干)과 친족인 예수교 교사 윤영만(尹永滿)을 찾아가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다. 윤영복의 이야기를 들은 오용간과 윤영만도 뜻을 함께하고, 세 사람은 22일에 열리는 덕성리 장날을 거사날로 결정하였다. 윤영복과 오용간은 자신의 집에서 만세운동을 쓰일 큰 태극기(大旗)] 1장과 작은 태극기[小旗] 20장을 각각 제작하여 준비하였고, 거사를 같이할 인물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윤영복을 통하여 전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22일에 덕성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계획되고 있음을 알고 뜻을 같이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외에도 같은 교회 신도인 안천종(安千鍾)·안상종(安常鍾)·이준업(李俊業)·이영섭(李泳燮)·안덕환(安德煥) 등이 함께 하기로 하였다. 오용간 또한 같은 교회 신도들에게 윤영복에게 들은 이야기를 알리고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자 윤도치(尹道致)·이윤선(李允先)·이상호(李相浩)·김만수(金萬守)·김유곤(金有坤)·정백용(鄭伯用) 등이 참여를 결정하였다. 3월 22일 거사 당일 윤영복과 오용간에게서 태극기를 미리 받고 오후 1시 덕성리 장터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오후 1시 만세운동에 참여할 사람들이 모두 장터에 모이자 윤영복이 먼저 큰 태극기를 높이 들었다. 이를 신호로 오용간도 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두 사람의 선창에 장터에 곳곳에 있던 교인들도 품고 온 태극기를 꺼내어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외침에 시장에 있던 군중도 호응하기 시작하면서 장터 안에는 ‘독립만세’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에 힘을 얻은 만세시위 주도자들과 군중은 장터를 벗어나 덕성리 길거리를 행진하며 시위를 확대하였다. 덕성리 일대 거리 행진에는 오용간이 만든 큰 태극기를 휘두르며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덕성리 장터에서 거리로 만세운동이 확대되면서 이 소식을 알게 된 일제 경찰이 즉시 출동하였다. 일제 경찰은 총칼로 군중을 위협하여 무력으로 그들을 해산시켰는데, 이때 만세운동을 이끈 23명의 인사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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