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鍾瓚
鍾瓚1883. 12. 12 ~ 1953. 10.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함안군 함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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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3년 12월 12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여항면(艅航面) 외암리(外岩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19일 함안군 함안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함안 지역 만세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한 지역 인사들이 1919년 3월 5일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이들과 지역 인사들이 모여서 독립선언서 복사와 태극기 제작,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망 구축 등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함안면 만세시위는 3월 19일 장날에 전개되었다. 읍내 중심지인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시작된 만세시위를 선두에서 이끌었다. 장날이라 읍내에 나와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세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경찰관 주재소, 군청, 등기소 등에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내부로 들어가 기물과 문서를 파손하고 관계자들을 폭행하는데 앞장섰다. 안혁중(安赫中)·조계승(曺啓承)과 함께 경찰서장 기타무라 하루토(北村晴澄)와 함안 군수 민인호(閔麟鎬)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면서 만세시위를 했다는 증명서를 교부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시위대가 대규모로 증가하고 투석전과 기물 파손 등 물리력을 동반한 만세시위로 발전하자 일제 경찰은 일본군 수비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다. 마산(馬山)에서 일본군 중포병대대 16명이 출동해 일제 경찰과 합세하여 본격으로 만세시위를 진압하면서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후 일제 군경은 만세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작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안혁중·조계승과 함께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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