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宗仁
宗仁1869. 6. 15 ~ 1947. 1. 2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하동군 고전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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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69년 6월 15일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고전면(古田面) 성천리(城川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6일 하동군 고전면 주교리(舟橋里)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을 비롯해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박영묵(朴永黙)·이종의(李宗義)·정상정(鄭相正)·정의용(鄭宜鎔) 등 동지들과 모여 현 시국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그리고 인근에 거주하는 마을 청년 33명을 규합하여 비밀결사인 일신단(一身團)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하동군 고전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거사일을 고전면 주교리 시장 장날인 4월 6일로 정하였다. 먼저 독립선언서를 구하기 위해 일신단원 가운데 한 명인 정재기(鄭在基)를 하동면(河東面) 읍내로 보냈으나, 도중에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 일로 마을의 경계는 크게 강화되어 거사를 준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계획에 맞춰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거사일인 4월 6일 일신단원들은 지게를 지거나 농립(農笠)을 쓰고 장꾼으로 가장하여 일찍이 약속 장소인 주교리 시장에 잠입하였다. 오후 1시 40분 장터에 사람들이 대거 모이자 박영묵이 미리 제작한 커다란 태극기를 들고 단상위로 올라가 만세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쳤다. 그러자 숨어있던 일신단원들이 호응하며 양손에 태극기를 흔들면서 나와, 독립만세를 제창하였다. 이에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크게 고무되어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고, 점차 시위대의 규모도 확대되었다. 시장에서 만세시위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제 경찰들과 헌병이 강제로 만세시위를 저지하려고 하자 화가 난 시위대와 함께 이들에게 달려들어 총검을 빼앗고 제복을 벗긴 뒤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들이닥친 헌병 수비대에 의해 시위대와 더불어 결국 강제로 해산되었다. 다음 날 헌병들과 경찰들이 총을 난사하면서 마을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부녀자와 아이들을 뒷산인 삼봉산(三峰山)으로 피신시킨 뒤 박영묵 등과 함께 나타난 일제 경찰에게 “어제의 거사는 모두 우리 네 명이 한 일이며, 그 외는 모두 장꾼들이다. 책임은 우리에게 있으니 우리를 체포하라!”고 말하면서 저항하지 않고 붙잡혔다. 1919년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진주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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