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宗遠
宗遠1894. 1. 12 ~ 1940. 6. 2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1919년 시흥군 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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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2) 1894년 1월 12일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서면(西面) 소하리(所下里, 현 광명시 소하동)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명은 이종운(李鍾雲)·이원중(李元仲)이다. 1919년 3월 28일 시흥군 서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시흥군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시흥군에서는 3월 7일 영등포 보통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었지만, 이후 소강 상태였다가, 3월 23일부터 수백 명의 시위대가 4월 1일까지 치열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면서 시흥군 영등포면(永登浦面, 현 서울시 영등포구)과 신동면(新東面, 현 서울시 서초구 일대)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27일 서면 소하리(所下里, 현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아들인 이정석(李貞石)이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혀 서면 노온사리(老溫寺里)에 위치한 노온사경찰관주재소에 구금되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 80여 명이 모였고, 같은 마을에 살던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 최호천(崔浩天)과 윤의병(尹宜炳)이 “이 사람만으로는 부족하니 주변 마을 사람까지 규합하자”라고 제안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8일 밤 11시가 되자 200여 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노온사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갔다. 이곳에서 주재소를 포위하고 이정석을 석방하지 않으면 건물에 불을 지르고 순사와 순사보를 살해하겠다고 경고하였고, 주재소의 게시판을 파손하고 뒷벽을 부수었다. 일제 순사가 이미 이정석은 영등포경찰서로 이관하였으며 본서에 가서 그의 석방을 요구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시위대는 다음 날 이정석을 석방시키지 않으면 다시 주재소를 습격하겠다고 밝히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뒤 해산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5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 해 10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사건을 파훼하고 대구복심법원으로 이관하였다. 결국 같은 해 12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벌금을 완납하지 못하면 30일간 노역장 유치에 처한다는 조건으로 벌금 30원을 받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임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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