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鍾旭
鍾旭1896. 8. 9 ~ 1966. 12.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울산군 하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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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6년 8월 9일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하상면(下廂面) 남외리(南外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제조업에 종사하면서, 그 해 4월 4~5일 울산군 하상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울산군에서는 1919년 3월 말부터 천도교인, 학생, 청년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준비되었다. 3월 30일에는 울산군청 명의로 울산군 각 면에 직원들의 사직서 제출을 요구하는 격문이 배포되었고, 4월 2일에는 언양면(彦陽面) 남부리(南部里) 언양시장 장날을 맞이하여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때에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하상면으로 귀향한 한명조(韓命祚)와 이영호(李永浩)는 서울 만세운동 소식을 고향에도 전하였다. 이에 하상면 청년회 간부 이종근(李鍾根)·이현우(李鉉禹)·이문조(李文祚)·박영하(朴永夏)·양석룡(楊錫龍)·김장수(金長壽)와 함께 하상면 일대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들과 함께 이종근·박영하의 집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한편, 거사일은 4월 4일로 정하였다. 4월 3일에는 이종근의 집에서 만세시위를 위한 모임에 참여하고, 박영하의 집에서 복사지로 독립선언서 200장을 작성하였다. 한편 청년회의 양석룡·이종룡(李鐘龍) 등은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500장을 제작하고, 종이와 명주를 이용해서 ‘구대한국독립만세(舊大韓國獨立萬歲)’,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쓴 대형 깃발을 제작하였다. 4월 4일 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에 집결하였다. 오전 11시 40분을 전후로 양석룡이 ‘대한독립만세’가 적힌 대형 깃발을 들자,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청년회 회원 및 마을주민들과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대를 인솔해서 서리(西里)·동리(東里)·남외리(南外里)·산전리(山田里) 일대를 행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동조하는 마을 주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2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출동한 일제 군경이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4명의 시위대와 함께 현장에서 붙잡혀 울산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이후 하상면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사와 투옥된 인사들은 ‘기미계(己未契)’를 만들어서 만세시위 사망자의 제사를 주관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3·1봉제회(奉祭會)’로 개편되었고, 삼일사(三一祠)라는 사당도 건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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