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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岳

鍾岳

1897. 9. 19 ~ 1971.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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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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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奉化)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봉화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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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안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5) 1897년 9월 19일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법전면(法田面) 어지리(於旨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경북 안동군(安東郡) 안동면(安東面)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안동군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3일 이상동(李相東)이 홀로 전개한 안동면 만세시위가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많은 주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바뀌어, 같은 달 17일 예안면(禮安面) 만세시위에는 1,000여 명, 18일 안동면 만세운동에는 2,500여 명이 모였다. 3월 18일 오전 11시경 시작된 안동면 만세시위는 오후 6시경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상황에 불안을 느낀 일제 경찰은 강제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의 칼에 시위대 일부가 부상당하고, 주도자가 체포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강제로 해산 당한 시위대는 날이 어두워지자, 또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 위하여 모였다. 이때 김익근(金益根)·이비호(李丕鎬)와 함께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3월 18일 밤 12시경 2,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안동면 읍내에 모여서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원이 모인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며 거리를 행진하였다. 이어 19일 새벽 1시경 시위대와 함께 고조된 열기에 힘입어 관공서로 가서 무력으로 항일독립의 의지를 표출하였다. 안동군청과 경찰서,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 몰려가 그곳을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구속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시위대는 군청과 경찰서에 돌을 던지거나 밀고 들어갔으며, 애국지사를 구출하려고 방화하는 등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시위대의 격렬한 만세시위 소식을 접한 일제는 일본군 수비대 20여 명을 급파하였다. 출동한 일제 군경은 시위대를 향하여 총을 발포하고 칼로 위협하며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거나 칼에 찔리는 등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였다. 이때 머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시위대와 함께 일제 군경의 진압에 분노하며 만세시위를 멈추지 않고 더욱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제 군경에게 현장에서 붙잡혔다.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이듬해인 1920년 2월 17일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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