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鍾植
鍾植1882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단천군 파도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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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2)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이중면(利中面) 창동리(昌洞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38세로, 1882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10일 단천군 파도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단천군 만세시위는 천도교 인사들의 주도로 전국 각지의 만세운동 소식과 독립선언서가 전달되면서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8일 단천군 천도교구장 염원형(廉元亨)은 천도교 인사들과 회합을 가졌다. 그날 회합에 참여한 염원형을 비롯해서 천도교회 서기 설운용(薛雲龍), 약재상 최덕복(崔德福), 농업에 종사하였던 최석곤(崔錫崑)·안성교(安聖敎) 등은 3월 10일 교조 최제우에 대한 추모 행사 직후 파도면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염원형은 최석곤과 설운룡에게 만세시위에 사용할 독립선언서 200장을 등사할 것을 지시하였다. 3월 10일 단천군 파도면 만세시위에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날 오전 11시 무렵 300여 명의 천도교인들은 최제우 추모 행사와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서 단천군 천도교구실에 집결하였다. 추모 행사를 마친 후 염원형은 천도교인들과 일반 군중에게 만세시위의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이어서 염원형·김상갑(金尙甲)·최석곤·설운용·안성교를 중심으로 한 주도세력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시위대를 이끌고 파도면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날 단천군 파도면 만세시위는 1,0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대에 참여하였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단천군 천도교구실에서 읍내 시장을 지나서 남문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주남리(州南里)에 이르자 단천 헌병분대의 일제 헌병이 시위대의 행진을 저지하였다. 일제 헌병이 시위대의 해산을 명령하자, 최석곤은 시위대를 향해서 결코 헌병의 말을 듣지 말고 끝까지 저항하자고 외쳤으며, 설운용 등은 일제 헌병의 명령에 따르지 말고 대항하라고 소리쳤다. 이때 시위대의 일원으로 일제 헌병의 시위 진압에 맞서 싸웠다. 일부 시위대는 일제 헌병에게 막대를 휘둘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일제 헌병을 향해서 투석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일부 시위대가 돌진하면서 일제 헌병의 무기를 탈취하려고 시도하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군도를 휘두르고 총격을 가하였다. 일제 헌병이 휘두르는 군도에 복귀면(福貴面)의 서봉화(徐鳳化)가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하다면(何多面) 출신의 이영호(李永浩), 신만면(新滿面) 출신의 염석한(廉錫漢)·염석하(廉錫河) 형제, 이종환(李鍾煥)도 일제 헌병의 발포와 무력 진압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파도면 만세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붙잡힌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3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염원형 등 파도면 만세시위자로 재판에 회부된 인사들과 함께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 해 10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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