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鍾珣
鍾珣1882. 11. 27 ~ 1934. 3. 3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의성군 안평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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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2년 11월 27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봉양면(鳳陽面) 사부리(沙阜里)에서 태어났다. 지역 유생으로서, 1919년 3월 17일부터 18일까지 봉양면 사부동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거행된 후 그 소식이 전국으로 번져나가고 이에 호응하여 평양(平壤)·대구(大邱) 등에서 자발적인 만세시위가 모색되었다. 이에 한국이 독립할 절호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고,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의 거사를 계획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17일 저녁 태극기 2개를 제작하였고, 그날 밤 11시경 마을 뒷산에 올라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거사 장소로 이동하던 중 만나게 된 학생과 주민들에게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설명하며 동지 수십 명을 그 자리에서 규합하였다. 이후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에 대한 염원과 의지를 드러냈다. 한편, 같은 동네에 거주하던 주민인 이복구(李福求)는 3월 18일 아침 마을 주민으로부터 “이웃마을인 안평동(安平洞)에서도 전국적인 만세시위에 동참하고자 거사를 진행 중인데, 사부동 주민들만 몸을 사리면서 침묵하는 것은 크게 잘못됐다”는 지적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에 같은 동네 주민인 이종광(李鍾光)의 집으로 달려가 이 소식을 전하며 사부동 주민들도 자체적인 만세운동을 시행하기로 협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후 이복구·이종광과 접촉하여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하기로 합심하였다. 이에 그들은 독립의 대의에 공감하여 행동을 함께하기로 약조한 마을 주민 수십여 명을 대동하고, 오후 8시경 마을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징역 10월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 해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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