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正春
正春1882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공주군 신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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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신상면(新上面) 유구리(維鳩里, 현 공주시 유구읍 유구리)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38세로, 1882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14일 공주군 신상면 유구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신상면 유구장터 만세운동은 천도교도 황병주(黃秉周)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매일신보』의 기사에서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가 서울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자신의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겠다고 결의하였다. 유구장터의 장날이었던 3월 14일 오후 4시 황병주는 홀로 장터의 군중 앞으로 나서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때 장터에 나왔다가 이 모습을 보고 공감하여 만세시위에 합류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적극적으로 외쳤다. 만세시위는 시간이 갈수록 그 규모가 확대되어 시위대열을 형성하고 유구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였다. 만세시위대가 장터의 우(牛)시장 앞으로 행진할 무렵, 유구주재소 순사들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다. 일제 경찰의 강압적인 해산 명령에 분노한 주민들이 시위대에 속속 동참하면서, 그 규모는 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해산 강요 에도 불구하고 시위대의 규모가 늘어나자, 일제 경찰은 시위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우선 만세운동의 중심 인물인 황병주를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분노한 이승현(李升鉉)과 황연성(黃璉性) 등은 다른 참여자들에게 “어찌하여 가만히 보고만 있는가? 주재소로 가서 황병주를 구출하자”라고 즉석에서 제안하고, 시위대를 지휘하여 유구주재소 습격을 주도하였다. 이들의 지휘에 따라 박준빈(朴準斌)·현우석(玄宇錫)·이우상(李雨相)·이홍규(李弘珪)·조병옥(曺秉玉)·김좌록(金左錄〮在錄) 등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황병주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황연성은 시위대를 대표하여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황병주를 석방하지 않으면 군중을 해산시킬 수 없다”라고 일제 경찰에 경고하며 황병주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주재소의 순사들은 석방 요구를 거부하고, 시위대의 해산을 압박하였다. 이러한 주재소 순사들의 태도에 분노한 박준빈은 황병주의 석방을 재차 강력히 요구하며 순사를 구타하였고, 현우석은 몽둥이로 주재소의 기물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박준빈과 현우석의 행동에 호응하여 안만원(安萬元)·유진태(兪鎭台)·김상규(金相圭)·강태하(姜泰河)·윤창선(尹昌善)·이우상·이홍규·조병옥 등과 함께 시위대를 독려하며, 주재소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창문을 깨뜨리고, 몽둥이를 이용하여 주재소의 문과 전등을 파괴하였다. 이와 같은 격렬한 시위에 더 이상 유구주재소의 경찰력으로는 시위대를 저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공주경찰서는 순사와 헌병 10여 명을 유구주재소로 급파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주도 인물 20여 명을 붙잡았다. 이때 시위의 주도인물로 지목되어 이승현·박준빈·황연성 등과 함께 공주경찰서로 연행된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16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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