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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會榮

會榮

1867. 3. 17 ~ 193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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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會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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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신민회
  • · 경학사
  • · 신흥무관학교
  • · 남화한인청년연맹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보안법위반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67년 (음)3월 17일 서울 저동(苧洞)에서 아버지 이유승(李裕承)과 어머니 동래 정씨(東萊 鄭氏)의 6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우당(友堂)이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0세손이며, 아버지 이유승은 이조판서와 의정부참찬을 지냈다. 조선조에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을 배출할 만큼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대표적 가문이었다. 형제가 위로 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과 밑으로 시영(始榮)·호영(頀榮)이 있었다. 후일 이들 6형제가 독립운동에 투신해 독립운동의 명문가를 이뤘다. 벼슬길에 나아갈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마다하고 학문과 인격 도야에 힘을 써 나갔다. 소탈하고 평민적 성품을 지녀 집안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 주고, 남의 집 종일지라고 높임말을 써 인간 평등의 사상을 실천해 갔다. 청상과부가 된 여동생을 재가시킨 일화 역시 낡은 제도와 인습에 얽매이지 않았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서예와 시문은 물론 음악과 회화·전각 등에 두루 능하였다. 특히 묵란(墨蘭)은 대원군에 버금갈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 시대적 전환기를 맞이해 전통 학문에만 머물지 않고 신학문과 신문명을 수용하는 데 앞장섰다. 1885년 무렵 동생 이시영과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신흥사에서 몇 달씩 합숙하면서 신학문을 탐구하고 토론으로 밤을 지새웠다. 20대 초에 이르러서는 관심 분야가 동서양의 역사 문화를 비롯해 서구의 정치·경제·법률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그 깊이를 더해 갔다. 그리하여 “이제 제왕의 시대는 갔고 사민(四民) 자유평등의 시대가 왔으니, 우리의 전통과 습성을 생각하면서 시대 조류에 따라 새나라 건설 이론을 확립해야 한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1898년 남산 홍엽정에서 이상설·여준 등과 세상사를 논하면서, “2천만 동포가 크게 깨닫고 일어나 국민의 지혜를 밝게 하고, 정치를 쇄신해야 한다. 문화가 발전되고 풍기가 선명해져 독립과 자유를 완전하게 하고, 세계 열강과 나란히 서서 경쟁하게 되고 난 후에야 보국안민을 기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1901년 국운이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자금이 필요할 것을 예상하고 큰돈을 들여 목재상과 인삼밭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목재상은 사기를 당하였고, 개성에 있던 인삼밭은 수확을 얼마 앞두고 도둑을 맞았다. 도둑은 개성경찰서의 일본인 고문이었는데, 그는 오히려 인삼밭이 무허가라면서 위협하였다. 이에 법정투쟁을 통해 도둑맞은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이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알려지고, 고종이 통쾌히 여겨 탁지부 주사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904년 기독교에 귀의해 상동교회 부설 상동청년학원을 세워 2년간 학감을 맡으며 청년 교육에 앞장섰다. 상동청년학원에는 전덕기(全德基)·김진호(金鎭浩)·이동녕(李東寧) 등이 참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을사늑약 반대운동을 강력하게 펼쳐 나갔다. 또 이상재(李商在)와 함께 종로 거리에서 모인 군중을 향해 온 백성이 일어서야 한다고 울부짖었다. 이때 을사오적 처단의 뜻을 품은 나인영(羅寅永)·기산도(奇山度) 등에게 자금을 지원하며 거사를 후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무렵 조카딸이 박제순(朴齊純)의 아들과 결혼을 잡아놓고 있었는데, 형제들과 의논해 혼인을 파기하고 절교를 통보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국권이 상실되자, 1906년 이상설·여준·이동녕 등과 함께 해외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뜻을 모으고, 이상설 등이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다. 서전서숙은 북간도 한인사회 민족교육의 기원을 이뤘다. 1907년에는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기회로 삼아 특사 파견을 추진해 나갔다. 이때 비밀리에 고종을 만나 헤이그특사 파견의 결심을 얻어 내는 막후 역할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에서 귀국해 신민회를 창건할 때 상동교회 인사들과 함께 참가하였다. 그리고 그해 7월 고종의 강제 퇴위, 8월 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상황에서 더이상 언론·교육의 계몽운동 방식으로는 국권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독립군 양성을 위한 독립군기지 개척의 방도를 모색해 갔다. 이에 1908년 여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던 이상설을 찾아가 국제 정세를 논하고 독립군 양성 계획의 방향을 도모하였다. 1910년 8월 독립운동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이동녕·장유순(張裕淳)·이관직(李觀稙) 등과 서간도 일대를 답사한 뒤, 12월 30일 6형제의 일가 권속 60여 명을 인솔해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하였다. 이들 6형제는 가산을 정리해 망명 자금으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둘째형 석영이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의 양자로 받은 만석지기의 땅을 팔면서 망명 자금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1911년 이상룡(李相龍)·김대락(金大洛)·김동삼(金東三) 등 안동유림 일가가 망명해 오면서 한인사회 건설은 본궤도에 올랐고, 그해 봄 삼원보 추가가(鄒家街)에서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였다. 경학사란 명칭은 농사하며 공부하자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었다. 여기에서 공부란 단지 지식을 익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뜻도 담겨져 있었다. 이는 ‘경학사 취지문’에서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현지 중국인들의 경계로 토지 구입이 어렵게 되자, 베이징(北京)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직접 찾아가 도움을 얻어 합니하(哈泥河)에 토지를 매입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독립군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흥강습소는 1912년 신흥학교로 개편되고 이석영이 교장을 맡았다. 신흥학교는 본과와 특과의 두 과정이 있었는데, 본과가 중학과정으로서 4년, 특과는 군사학을 가르치는 과정으로 6개월, 3개월 속성과였다. 1913년 일제가 독립군기지를 파괴하기 위해 한인촌을 공격해 오자, 자리를 피해 연해주로 건너가 이상설과 만나 국제 정세를 논하며 독립전쟁의 방략을 구체화시켜 갔다. 그리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1914년 국내로 방향을 전환해 비밀리에 귀국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이상설을 돕던 러시아가 대한광복군정부를 해체하면서, 이상설도 연해주를 떠나 베이징으로 옮겨야 하였다. 이상설은 베이징에서 신한혁명당을 결성하고 고종의 망명을 추진해 갔다. 이때 국내에서 고종의 망명을 비밀리에 추진해 갔는데, 일제 경찰에게 사전 발각되어 붙잡히고 3주일간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보안법위반사건’이라 부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사회에서 약소민족의 독립문제가 제기될 때 고종의 망명을 다시 추진하였다. 이때는 주로 국내 인사들과 계획을 세워 갔는데, 워낙 극비에 이뤄졌던 일이라 면면을 밝히기 어렵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고종의 시종인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의 승낙을 얻고 민영달(閔泳達)로부터 5만원을 받아 베이징에 황제가 거처할 집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 이때 이득년(李得年)과 홍증식(洪增植)을 통해 5만원을 베이징에 있는 이시영에게 전달해 행궁 채비에 만전을 기울일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아들 이규학(李圭鶴)의 처가 대원군의 외손녀(조계진 趙季珍)이자 고종의 조카딸이었기 때문에 신부례를 이용해 긴밀히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1919년 1월 22일 새벽 고종이 갑자기 서거하면서 그런 노력들이 허사로 돌아가자, 같은 해 2월 지체 없이 베이징으로 다시 망명을 단행하였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국내외 각처의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上海)에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였다. 이때 상하이로 건너가 “정치·행정적 조직보다는 독립운동을 총괄 지휘할 실질적 본부가 필요하다”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상하이에서 2개월 정도 머물며 임시의정원에 적을 두다가 5월에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상하이에서 박찬익(朴贊翊)이 파견되어 6개월이나 머물면서 설득해 보았지만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동생 이시영과 평생의 벗 이동녕이 상하이 임시정부로 갈 때에도 홀로 베이징에 남았다. 이 무렵 베이징에서는 신채호(申采浩)·박용만(朴容萬)·신숙(申肅) 등이 임시정부와는 별도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고 있었다. 주된 내용은 만주 독립군을 연합하여 활성화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해 1920년 9월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를 발기하고 독립군 대표의 모임을 준비하였으나, 청산리대첩 이후 독립군의 주력이 시베리아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하였다. 박용만이 여러 차례 찾아와 자신들의 뜻에 동조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또 다른 파벌을 만드는 것이라 여겨 쉽게 응하지 않았다. 이후 베이징세력이 반임시정부, 반이승만을 외칠 때도 동조하지 않았다. 당시 베이징의 자택에는 독립운동가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길게는 몇 달을 머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찾는 이가 많게는 30, 40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 독립운동의 거두들은 물론 젊은 청년들까지 머물곤 하였다. 『상록수』의 심훈(沈熏)도 한 달이나 머물렀으며, 아나키스트 유자명(柳子明)·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공산주의자 홍남표(洪南杓)·성주식(成周寔) 등도 찾아와 이념이나 노소 불문의 독립운동 본거지가 되고 있었다. 1921년 젊은 아나키스트인 정화암(鄭華岩)·이을규·이정규 등과 만나 장기적 방도로서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베이징 근처의 영정하(永定河) 하천 부지 불하 계획을 세웠다. 토지 불하 허가까지 받았으나 자금 마련이 여의치 못해 중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1922년 2월 만주 지역 독립군 간의 마찰이 심해지자 만주로 건너가 통군부의 통합회의, 8월 남만한민족통일회의를 주도하였으나 복벽주의와 공화주의 간의 분열이 무력 충돌로 비화되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이후 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해 베이징에서 이세영(李世永)·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한민교육회를 조직하였다. 1923년에는 베이징 한인 청년들이 다물단(多勿團)을 결성할 때 조직에 필요한 정신과 요령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다물단에는 아들 이규학과 둘째형 이석영의 아들도 참가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작자급(自作自給)과 공존공영(共存共營)의 사회성을 바탕으로 구생활(舊生活)을 타파하고, 피압박민족해방운동과 연대 활동을 모색해 갔다. 다물단은 의열단과 연대해 1925년 3월 밀정 김달하(金達河) 처단 의거를 결행하였는데, 이 일로 딸 이규숙(李圭淑)이 공안국에 붙잡혀서 1년간 구금되었고, 이규학은 상하이로 피신하면서 이규학의 두 딸과 자신의 막내 아들 이규오를 잃는 비극적인 일을 맞이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이정규와 함께 후난성(湖南省) 산수아현(漢水縣)의 양도촌(洋濤村)에 이상촌을 건설하는 계획을 세워 나갔다. 이상촌 건설이란 한인을 집단 이주시켜 자급자족의 생활 기반을 마련하고,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구상에서 추진한 것이다. 이런 독립운동 구상은 1910년 해외 망명 이래 삼원보에서 독립운동기지를 설립하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1924년 이을규·이정규·백정기(白貞基)·정화암·유자명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행하였다. 『정의공보』는 중앙집권적 공산주의와 독립운동 진영 내의 파벌싸움을 비판하고, 자유연합의 원리에 따른 독립운동의 이론을 제공하는 선전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5년에는 김창숙(金昌淑)과 함께 내몽골 포두지방에 황무지를 개척해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계획을 세워 나갔다. 김창숙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다가 1926년에 발각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2차 유림단사건’이다. 이 무렵 베이징에서 극심한 생활고를 겪다가 톈진(天津)의 프랑스 조계지로 이사하고, 나석주의거 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아들 이규창(李圭昌)과 함께 지난(濟南)·쉬저우(徐州) 등지로 무전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 어렵고 힘든 망명 생활 중에도 젊은 동지들에게 단소와 양금을 가르쳐 주는 등 인간적인 여유를 잃지 않았다. 1928년 6월 상하이에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이 창설될 때,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란 글을 보내 후원을 호소하고, 1929년 이을규·백정기·정화암·김종진(金宗鎭) 등이 결성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후원하였다. 1930년 국내에서 거금을 마련한 신현상(申鉉商)이 재중아나키스트 운동을 후원할 계획이었으나, 중국 경찰에 붙잡혀 돈을 뺏기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상하이로 건너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상하이에서 개편한 것으로, 유자명·유기석(柳基石)·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정화암·안공근(安恭根)·오면직(吳冕稙)·이현근(李炫謹) 등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중국에서 일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강력한 의열투쟁의 방략을 채택하였다. 1931년 10월 항일구국연맹의 결성에도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개편한 항일구국연맹에는 한국인 아나키스트 정화암·백정기 등 남화한인청년연맹 출신이 참가하고, 중국 아나키스트 왕야치아오(王亞樵), 후아준쉬(華均實) 등과 일본 아나키스트 사노 이치로(佐野一郞) 등이 참가해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하였다. 연맹의 산하에 행동대를 두었는데, 이를 흑색공포단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일제의 만주침략과 중국대륙 침략을 맞이해, 아나키스트들의 조직을 강화하고 투쟁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이 무렵 이봉창의거와 윤봉길의거가 일어나 꺼져가던 독립운동의 기운이 소생되는 상황에서, 1932년 11월 초 무대를 만주로 옮기기 위해 상하이를 출발하였으나, 밀정의 밀고로 다렌(大連)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그해 11월 17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석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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