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載裕
載裕1905. 8. 28 ~ 1944.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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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장(200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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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2006) 1905년 8월 28일 함경남도 삼수군(三水郡) 별동면(別東面) 선소리(船所里)에서 아버지 이각범(李珏範)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이명은 김소성(金小成)·전소수(全素洙)·박윤식(朴允植)·윤기순(尹基淳)·신용수(申龍洙) 등이다. 두 살 아래인 경주 김씨와 결혼하였다. 12살 무렵까지 조부 밑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삼수의 공립보통학교 5년에 입학하여 4개월을 다녔다. 1919년 만세운동이 발발한 이후 서울로 올라와서 1924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제2학년에 편입하여 다니다가 3개월 만인 같은 해 6월 월사금 미납과 부친의 사망으로 중퇴하였다. 1925년 4월 개성(開城)의 송도고등보통학교 제4학년에 편입하여 신사상을 접하였다. 같은 해 9월 무렵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같은 해 11월 동맹휴학으로 퇴학당하였다. 1926년 12월에 일본으로 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에 학적을 두고 고학하였다. 그러나 학비 때문에 그만두고 노동을 하면서 김한경(金漢卿)·김계림(金桂林)·인정식(印貞植)·윤도순(尹道淳) 등과 교유하였다. 1927년 봄에는 도쿄대(東京大)의 신인회(新人會)가 주최하는 노동학교에 등록해서, 일본의 저명한 사회주의자인 사노 마나부(佐野學), 후쿠모토 가츠오(福本和夫) 등에게 배웠다. 노동운동에 흥미를 가지고 전국무산자평의회, 일본노동조합평의회 계열의 동경합동노동조합(東京合同勞動組合)을 비롯한 사회주의 단체들에 가입하였다. 아울러 한국인이 참여하는 재일본노동총동맹, 이 단체의 동경동맹 및 재동경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하였으며, 1927년 5월 무렵에는 신간회(新幹會) 동경지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 후반기 이후부터 비합법 운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11월을 전후하여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일본부의 후보위원이 되었다. 이듬해 1928년 4월 중순에는 김한경을 책임비서로 하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일본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에 가입하였다. 전일본무산청년동맹(全日本無産靑年同盟) 해산 명령에 대한 항의문을 내무대신에게 발송하고 이를 각지의 운동자들에게 배달하려고 인쇄하다가 경찰에 검거된 이후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편입되었다. 1928년 8월 붙잡혀서 한국으로 압송되기까지 3년 동안의 도쿄 생활에서 경시청을 비롯하여 간다(神田)·니시키마치(錦町) 등의 경찰서에 70여 차례에 걸쳐 검속되었다.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 한국으로 호송되어 예심에 회부되었다. 1930년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개월(미결구류 500일 통산)을 받아 같은 해 11월 11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7월 7일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21일 형 만기로 풀려났다. 1933년 여름 이후 서울을 근거지로 공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비합법적 노동운동을 주도하였다. 대중의 실천 투쟁을 강조하면서, 모든 대중운동을 반전(反戰)·반파쇼·반제(反帝) 투쟁으로 발전시킨다는 방침을 견지하였다. 이때 이현상(李鉉相)·변홍대(卞洪大)·안병춘(安炳春)·이순금(李順今)·이종희(李鍾嬉)·유순희(兪順姬) 등과 함께 이른바 트로이카 방식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비합법의 당 재건운동이나 혁명 노조운동의 대부분이 전국 차원에서 중앙 집중에 의한 하향식의 소수 전위(이른바 오르그)가 지도하는 조직 방식을 택한 것과 달리 일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노동 대중에 의한 상향식의 조직 운동을 지향하였다. 이와 아울러 인천(仁川)에서 김삼룡(金三龍)과 함께 노동운동을 지도하였으며, 양평(楊平)에서는 변홍대 등과 함께 농민의 생활 상태를 조사하고 농민운동을 조직하였다. 최소복(崔小福)·이인행(李仁行)·변우식(邊雨植)·정태식(鄭泰植) 등과 함께 학생운동을 조직하여 독서회와 동맹휴업 등을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공장 내 활동방침」, 「학교 내 일상투쟁」 등의 팸플릿을 간행하였다. 이 시기에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와 제휴하여 반제운동을 조직하였다. 1934년 1월 22일에 서대문경찰서에 붙잡혀서 모진 심문을 받다가 같은 해 4월 13일 밤 탈옥에 성공하여 미야케 교수의 동숭동(東崇洞) 대학관사에 지하 토굴을 만들어 40일 정도 생활하였다. 1934년 5월 21일 미야케가 경찰에 피검되면서 박진홍(朴鎭洪)과 함께 신당동(新堂洞) 부근에서 아지트를 마련하여 1935년 1월초까지 서울 일대를 중심으로 비합법의 지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는 이관술(李觀述)·박영출(朴英出) 등과 함께 경성재건그룹을 중심으로 서울의 혁명운동을 통일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자기비판문」·「통일문제」·「학교 내 활동기준」·「청년 학생에 고함」·「공장 내 활동기준」 등의 팸플릿과 함께 각종 조사표 등을 작성하였다. 1935년 1월 일제 경찰의 대량 검거로 조직이 와해되고 나서 같은 해 3월 무렵부터 이관술과 함께 양주군(楊州郡) 노해면(蘆海面) 공덕리(孔德里, 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서 남부지방에서 수해로 이주한 농민으로 가장하여 정착하며 생활하였다. 만 평 정도의 황무지를 빌려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마을의 야학에서 주민들에게 한글과 산술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비합법 운동을 지속하였다. 경성준비그룹으로 불리는 이 시기에는 운동방침을 수립하고 운동자를 확보하는 한편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통일기관을 결성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조직문제의 의의와 그 필요」·「공산주의자 제그룹 및 공산주의자 제군에 보내는 메세지」·「공동 캄파니아 투쟁에 관한 건」 등을 간행하였다. 1936년 10월 20일 전국 차원에서 완성된 당재건의 정치 기관지를 지향하는 『적기』 1호를 창간한 후, 같은 해 11월 무렵에 2호, 그리고 피검되기 바로 전날인 같은 해 12월 24일 제3호를 발간하였다. 1936년 12월 25일 창동(倉洞) 제2우이교 부근의 산중에서 변복한 30여 명의 경기도 경찰부 소속 경찰들에 붙잡혔다. 경성준비그룹의 체포 사실은 일제의 보도통제를 통해서 검거 사실을 일반에 알리지 않다가 4개월에 걸친 조사를 끝내고 기사 해금을 하였다. 1937년 4월 30일자로 『조선일보』와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는 호외를 발행하여 대서특필하였으며, 『경성일보』는 「집요흉악의 조선공산당 마침내 괴멸하다」는 표제 아래 “20여 년에 걸친 조선공산당 운동사”가 “완전히 봉쇄”되고 “괴멸, 종식”되었다고 보도하였다. 붙잡힌 이후에는 일제 경찰의 가혹한 심문과 조사를 받았다. 공식으로만 보더라도 모두 14차례에 걸친 조사를 받고 1937년 4월 23일 검찰에 송치된 후 검사의 수사종결로 예심에 회부되었다.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이래 1938년 2월 예심이 종결되었다. 1938년 7월 12일 재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년(미결구류 150일)을 받았다. 같은 해인 1938년 7월 20일부터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면서도 '조선어 사용금지 반대, 수감자의 대우 개선, 간수들에 대한 사상고취' 등의 투쟁을 전개하다가 1년 정도 후에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44년 2월 21일 형이 만료되었지만, 1941년 개정된 이른바 치안유지법에 신설된 예방구금제도의 적용을 받아 재수감되었다. 지병인 각기병으로 1944년 10월 26일 40세의 나이로 옥중 사망하였다. 다만, 1936년 12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사진(보존원판 제33259호,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의 오른편에 붉은 필기체 글씨로 '1945년 공주형무소에서 사망'으로 적혀 있다. 이에 따르면 사망 연도는 1945년이 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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