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柱儀
柱儀1876 ~ 1923. 11.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임실군 둔남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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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둔남면(屯南面, 현 오수면) 용정리(龍井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44세로, 1876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한자가 다른 이주의(李注儀)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3일 이기송(李起松)·오병용(吳秉鎔) 등과 함께 고향 마을인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獒樹里)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둔남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23일 오후 2시 무렵 이기송과 김일봉(金一奉) 등이 장터에 모인 군중 앞에서 격정적으로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하는 연설을 하며 시작되었다. 이에 고무된 시위 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둔남면 일대의 주재소와 둔남면사무소 등으로 행진해갔는데, 이때 이만의(李萬儀)·이영의(李英儀)·이용의(李容儀) 등과 함께 시위 행렬을 주도하였다. 만세시위가 격화되면서 시위 군중은 시장 부근에 살던 일본인들의 가옥과 상점 등으로 몰려가 돌을 던지며 유리창과 각종 기물을 파손하는 등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만세시위 도중 이기송을 비롯한 시위 주도자들이 체포되자, 오병용 등과 함께 2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로 달려가 주재소의 문과 유리창을 부수고 항의하였다. 주재소에 있던 일본인 순사 무라이 유우츠기(村井邑次)와 한국인 순사보인 고택기(高宅基)가 당황하여 시위 군중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이만의 등과 함께 고택기에게 달려들어 총을 뺏은 뒤 그를 주재소의 경종대(警鍾臺) 아래로 끌고 나와 구타하였다. 그리고 유치장의 문을 부숴 이기송과 김영필(金永弼) 등 연행된 동지들을 탈출시켰다. 그날 저녁에 이르러 시위 군중의 숫자는 총 2,000명에 달하였으나, 이때 남원(南原)에 있던 헌병분대로부터 일제 경찰의 지원 병력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와 함께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다른 시위 참가자들과 함께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10월 3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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