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楨根
楨根1880. 12. 12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평양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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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880년 12월 12일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청산면(靑山面) 금봉리(金峰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무렵에는 평남 대동군(大同郡) 율리면(栗里面) 장천리(將泉里)에 거주하면서, 사립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1일 평양(平壤)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평양의 만세운동은 기독교계의 장로교(長老敎)와 감리교(監理敎), 그리고 천도교(天道敎)가 참여한 가운데 서울의 만세운동과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사전에 민족대표 33인과의 연락 속에서 만세운동이 준비되었으며, 따라서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던 시간인 오후 1시에 맞춰서 각각의 장소에서 집회가 준비되었다. 3월 1일 오후 1시 장로교 계열 사람들은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 감리교 사람들은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에, 천도교 사람들은 설암리 천도교구당(天道敎區堂)에 각기 모여들었다. 우선 고종의 추도식(追悼式)이 거행되고 난 후, 이어 독립선언서 낭독과 연설이 이어졌다. 이후 사람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대는 각기 다른 곳에서 출발하였지만, 평양경찰서가 위치하고 있는 남문(南門) 앞 거리로 모여들었다. 일제 헌병들은 해산을 종용하였지만 시위대는 계속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평양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일본인 신시가지는 물론, 일부는 도청과 재판소를 지나 평양역 광장으로 향했고, 다른 무리의 시위대는 평양부청과 일본인 중학교를 지나 평양형무소를 거쳐 서문 밖 거리를 지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사람들이 평양 시내에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할 때 함께 만세를 부르며 평양 곳곳을 누볐다. 그러던 중 일제 헌병에 붙잡혔고, 조사를 받은 후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 과정에서 “다수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을 뿐이고, 기쁜 마음으로 부른 것이기에 보안에 방해가 된 것이 없다”라며 항변하였으나,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1919년 4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5월 17일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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