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章俊
章俊1881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롱운
- · 노백인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7) 충청남도 한산군(韓山郡) 하북면(下北面) 마지리(馬池里, 현 서천군 마산면 마명리) 출신이다. 일제 측 기록에 따르면 1909년 재판 당시 29세로 1881년생으로 추정된다. 양반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였다. 조롱운(趙弄云) 의병부대와 노백인(盧伯仁)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7년 일본은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도 강제 해산시키자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908년 1월 즈음에 조롱운 의병부대에 참여하는 것을 계기로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조롱운은 주로 충남 임천(林川, 현 부여)·한산·남포(藍浦, 현 보령)·비인(庇仁, 현 서천군 서부) 등지에서 활약하였던 의병장이다. 조롱운 의병부대에 참여한 뒤 일본군과의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음)2월 8일 13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서천군(舒川郡)에서 활동하다가 우산리(牛山里)에서 일본군과 조우하여 전투를 치뤘다. 조롱운 의병부대는 이 전투에서 패하여 각자 흩어져 전라북도 지역으로 일시 도주하였다. 같은 해 (음)4월 5일 임천군 산속에서 다시 집합하여 부대를 재건한 뒤 같은 달 13일 한산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물품을 획득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후 의병장인 조롱운과 의견차이로 부대에서 나와 고향인 하북면에 잠시 머물렀다. 1908년 (음)9월 노백인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다시 이어갔다. 노백인은 한산군 하북면 출신으로 한산군 일대에서 활동하였던 의병장이다. 노백인 의병부대에서 부장(副將)에 임명되어 부대 운영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백린 휘하에서 한산 지역을 옮겨다니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음)9월말 일본헌병대의 습격을 받아 패배하고 부대가 흩어졌을 때도 굴하지 않고 남은 부하 7명을 이끌었다. 같은 해 (음)10월 임천군(林川郡) 입포(笠浦, 현 부여군 양화면 입포리)에서 홍산재무서(鴻山財務署) 소속 송주사(宋主事)로부터 징수 중이던 세금과 총을 빼앗아 의병부대 재건의 기반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후 같은 해 (음)11월에 노백인과 다시 재회하였으나 노백인에 대한 추적이 엄중하여 노백인은 다시 전북지방으로 몸을 피하고 대신 의병장이 되어 부대의 지휘권과 무기 일체를 이어받게 되었다. 이후 한산군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며 의병부대 재건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충남관찰사 최정덕(崔廷德)이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해당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소규모 의병부대라는 이점을 살려서 평소에는 각자 집에 흩어져 있다가 불시에 모여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고 확보한 군자금을 배분 후 다시 흩어지는 방식으로 부대를 운용하였다고 하며 이때 무기는 모두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부대는 1909년 2월에는 40여 명까지 다시 늘어나게 되었다. 이후 이들을 이끌고 임천군 즉용동(卽用洞)·고죽동(高竹洞), 한산군 동상면(東上面, 현 서천군 한산면) 나교리(羅橋里)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계속하였다. 또 고향인 한산군 하북면 마지리에서는 밀정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1909년 5월 한산군 동상면 송림리(松林里, 현 서천군 마산면 송림리)에서 주막을 하는 김월선(金月善)의 집에 머물던 중, 5월 24일 밤 1시 부하 6명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09년 6월 21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강도·고살(故殺)죄로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