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載大
載大1885. 2. 13 ~ 1932. 10. 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호남창의회맹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5년 2월 13일에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郡) 공산면(公山面) 화성리(花城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복남(李福南·李福男)을 사용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되는 등 국권을 상실할 위기 속에 다양한 항일 단체들이 결성되어 이에 대응하였다. 1906년 영광에서는 기삼연(奇參衍)과 김용구(金容球)를 비롯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들 중심으로 일심계가 조직되어 국권회복을 도모할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이어 1907년 정미7조약과 함께 광무황제(고종)가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당하는 등 국권상실이 현실화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해 갔다. 이 당시 전남에서 김준·김율 형제가 의병을 규합하자 이에 호응하여 참여하였다. 1907년 12월 중순경 기삼연과 김준은 호남창의회맹소를 분진키로 결정하고 기삼연은 장성·순창 지역에서, 김준은 영광·나주·함평·무안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부대를 강화하기로 하였다. 이때 김준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소규모 단위로 산악지대를 돌아다니며 유격투쟁을 전개해 갔다. 일제는 이에 맞서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전개하여 함평 연안지역으로 의병을 압박하는 포위 작전을 펼쳤다. 결국 기삼연은 1908년 2월 2일 순창에서 일본군 토벌대에 기습을 받아 체포되었으며, 이 소식을 접한 김준은 30여 명을 이끌고 기삼연을 탈환하고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호남창의회맹소는 다시 김용구와 김준 등 몇몇 지도부를 중심으로 재편되어 일본군과 유격전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기삼연의 사후에 김준의 지휘 하에 동료의병들과 함께 전면전보다는 유격전술이나 기습, 요격전을 주로 구사하였다. 이들은 특히 유격전술에 능하였는데, 일제는 이들을 “동작이 기민하여 신출귀몰, 군대와 경찰의 두통거리”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들은 또한 호남창의회맹소가 지향했던 활동 목표와 방향을 그대로 계승하였는데, 일제의 침략 기구와 징세 기관에 대한 공격 그리고 친일 세력 처단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해 갔다. 이들은 광주를 중심으로 인근지역에서 일제 수비대와 헌병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무등산 뒤편 무동촌(현 담양군 남면 무동리)에서는 일제의 광주수비대장을 사살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는 의병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데, 의병에 참여한 사람들의 가족에게 온갖 고초를 가하였다. 어머니도 일본군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이를 참지 못하여 스스로 체포되어 옥고를 겪기도 하였다. 옥고 중에 탈출에 성공한 후, “왜놈이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하고 고향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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