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李仁君

仁君

1880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仁君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국장(2009)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9)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외가천리(外加川里)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880년생으로 추정된다. 이후 원곡면 칠곡리(七谷里)로 이주하였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2일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의 연합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안성군에서는 1919년 3월 11일 서울에서 귀향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양성면의 만세시위가 전개된 이래, 같은 달 28일부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연일 계속하여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4월 1일의 연합 만세시위는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의 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竹栢里)의 이양섭(李陽燮) 등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이때 이유석과 홍창섭으로부터 만세시위 계획을 전해 듣고, 같은 마을주민들과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4월 1일 오후 칠곡리에서 2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집회 참여를 위해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원곡면 곳곳에서 약 1,000명의 주민들이 원곡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였다. 이들과 함께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격렬한 기세로 면사무소에서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 직원들을 끌어내 그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함께 외치게 하였다. 이에 만세시위의 기세는 더욱 고조되었고,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기세를 몰아 “양성으로 가자”라고 외치며 양성면의 주민들과 연합시위를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다. 주도자들의 제안에 호응하여 주변의 주민들과 함께 행진 대열을 갖추었다. 이유석 등의 지휘에 따라 횃불을 밝히고, 면장 남길우를 선두에 세워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만세시위대의 행렬이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성은고개에 이르렀따. 이유석 등의 주동자들은 일단 시위행진을 멈추고, 만세시위의 분위기를 재정비하기 위해 집회를 열었다. 이유석이 주민들 앞에 먼저 나서서 “양성주재소로 가서 일본순사들을 끌어내어 같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릅시다.”라고 연설하였다. 이후 홍창섭·이덕순·이근수·최은식 등이 서로 번갈아가며, “대한의 독립국이 생기면 일본의 야만적 식민정책을 수행하던 관청은 필요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앞잡이인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을 모두 때려 부숴야 한다. 그리고 양성읍내에 있는 일본인도 모두 쫓아 버려야 한다.”, “여러분은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활동하라.”라는 내용으로 연설하였다. 이에 주변에서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준비하여 다시 시위대열을 형성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이 위치한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한편 이날 양성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밤 9시부터 수백 명의 주민이 모여 일제 경찰의 주재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한동안 만세시위를 전개한 양성면 주민들은 해산하려고 하였으나, 성은고개로부터 횃불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양성면 쪽으로 행진해 오고 있는 원곡면의 만세시위대를 목격하였다. 두 지역의 주민들은 곧바로 합류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외치며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원곡과 양성 두 지역 주민의 연합으로 시위대의 규모는 2,000여 명의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양성면의 주민들과 얼싸안고 “이제는 독립이 되었다”라고 기뻐하며, 더욱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유석·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가장 먼저 일제 경찰의 주재소로 행진하여 주재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투석전을 전개하고, 일제 경찰들이 만세시위대의 규모에 놀라 도주하자, 들고 있던 횃불로 주재소의 기물에 불을 붙여 건물 전체를 소실시켰다. 이후 일제의 통신기관인 우편소를 공격하였다. 우편소의 주변에 민가가 많았기 때문에 건물은 그대로 두고 건물 안의 집기들을 다 들어내서 불태우고, 전신선을 끊고, 전신주를 넘어뜨렸다. 또 양성면사무소로 행진하여 기물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이후에는 양성면에서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잡화상 소토 사토요테(外里與手)의 상점과 고리대금업자 다카히데토모(隆秀知)의 집을 습격하여 출입구를 부수고 가구, 물품 등을 태워버렸다. 다음 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원곡면으로 돌아와 해산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만세시위 소식을 뒤늦게 접한 일제는 4월 3일 육군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 제79연대 3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4월 1일의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조사,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인정되어 안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후 고등법원 검사국에 의해 다른 만세시위 참여자들과 함께 내란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만세운동은 소요죄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라고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하여 돌려보냈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죄 등으로 징역 7년(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