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裕元
裕元1888. 11. 4 ~ 1945. 1.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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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8년 11월 4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원칠(李元七)이다. 고향 마을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전개된 만세시위는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竹栢里, 현 평택시 죽백동)의 이양섭(李陽燮) 등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여기에 양성면 주민들이 가세하여 시위가 확대되었다. 원래 원곡면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안성군에 통합되기 전까지 양성면과 함께 과거 양성군(陽城郡)에 속했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19년 4월 1일과 2일에 걸친 만세운동은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 만세시위는 만세운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만세시위 중 하나로 꼽힌다. 4월 1일 오후 이유석·홍창섭 등으로부터 “오늘 밤 모두 면사무소로 앞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자”는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았다. 같은 마을의 이병오(李丙五)·이상근(李相根) 등의 주민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만세시위에 참여를 결의하고, 면사무소로 갔다.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약 1,0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의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이유석 등 주도자들은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이들을 면사무소 밖으로 끌어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이들이 만세시위의 위세에 눌려 순순히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에 만세시위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이유석·홍창섭 등은 만세시위대를 향해 “양성으로 가자”고 외쳤다. 양성면은 과거 양성군의 소재지였기 때문에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 일제의 주요 행정기관들이 위치해 있었다. 주도자들의 제안에 다른 주민들과 함께 적극 호응해서 횃불을 밝히고, 선두에 면장 남길우를 앞세운 만세시위 대열을 갖추어 양성면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행진하였다. 양성면으로 넘어가는 성은고개의 정상에 만세시위대가 도착하자, 이유석 등의 주도자들은 만세시위대의 휴식을 취할 겸 행진을 멈추고 집회를 개최했다. 이유석을 시작으로 홍창섭·이덕순·이근수·최은식 등이 차례로 만세시위대 앞으로 나와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며, 일제의 시설들을 파괴하자는 등 주민들을 매우 격동시키는 내용으로 연설했다.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준비해서 다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양성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날 밤 오후 9시 경부터 양성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양성 경찰주재소 앞에 수백 명의 양성면 주민들이 집결하여 일제 경찰을 향해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양성의 주민들은 만세시위를 해산하려던 즈음, 양성으로 행진해 온 원곡면의 만세시위대가 합류하였다. 두 지역의 주민들이 연합하면서 만세시위대는 약 2,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고, ‘이제는 독립이 되었다’며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면서 만세시위의 분위기는 더욱 격동되었다. 서로 연합한 만세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가장 먼저 일제의 경찰주재소로 행진하였다. 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최은식·이상옥·이규완(李圭完)·한응교(韓應敎) 등과 함께 일제의 경찰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집기와 기물 등을 파괴하였다. 주민들의 습격에 놀란 일제 경찰들이 도주하자, 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주민들과 함께 주재소 건물에 불을 질러 완전히 소실시켰다. 다음 목표인 양성우편소로 행진하여 돌을 던지고, 이상옥 등과 함께 우편소 안으로 쳐들어가 의자와 책상을 부수고, 기물과 서류 등을 가지고 나와 모두 소각시켰다. 이후에는 평소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원성이 높았던 일본인 토자토 토요테(外里與手) 상점으로 만세시위대와 함께 행진하였다. 여기에서도 시위대의 선두에서 이상옥과 함께 상점 안의 의자를 꺼내 불태워 버리는 등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양성에서의 만세시위를 마무리 지은 후, 새벽 4시 경 다른 주민들과 함께 원곡면으로 귀환하여 이유석·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원곡면 면사무소를 향해 돌을 던지는 등의 마지막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일제는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매우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4월 3일 조선주차군 제79연대 3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과 함께 붙잡힌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죄, 소요죄 등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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