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殷奎
殷奎1868. 2. 12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관련 사건
- · 화천군 신읍리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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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0) 1868년 2월 12일 강원도 화천군(華川郡) 화천면(華川面) 신읍리(新邑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은교(李殷敎)이고, 한자가 다른 이은규(李銀奎)도 사용하였다. 천도교인이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23일 화천면 신읍리에서 거행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이끌었다. 화천군에서는 3월 초 천도교인의 주도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면서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3월 21일 자신의 집에서 같은 마을에 사는 김창의(金昌義)와 함께 거사를 계획하고, 화천면 읍내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장남 이달용(李達龍)에게 만세시위 때 사용할 깃발을 만들도록 하였다. 깃발에는 각각 「조선독립국만세(朝鮮獨立國萬歲)」와 「화천면민단(華川面民團) 대표자 김창의(金昌義), 이은규(李殷奎) 외 1명」이라고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같은 마을에 사는 박성록(朴成祿)·김한식(金漢植)·김용구(金容九)·김희인(金熙仁)·김한수(金漢洙) 등을 자택으로 불러, 김창의와 함께 만세시위 계획을 말하며 동참하기를 권유해 동지로 규합하였다. 이어서 이들과 함께 하남면(下南面) 논미리(論味里), 상서면(上西面) 구운리(九雲里), 화천면 풍산리(豊山里) 등 인근 여러 지역에 만세시위를 계획을 알렸다. 3월 23일 아침 김창의의 집에 주도자들과 함께 모였다. 그리고 박성록이 「조선독립국만세」 깃발·김용구가 「면민단대표자」 깃발을 들고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김창의와 함께 선두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화천면 읍내 장터를 향해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신읍리 직동(直洞)에 다다르자, 한정종(韓丁鐘)이 이끄는 노동리(蘆洞里) 주민들이 합세하였다. 이들과 함께 신읍리 동지화동(東芝化洞) 고개에 도착하였지만, 시위대를 막기 위해 출동한 일제 헌병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화천면 읍내 장터로 가는 길을 미리 막고 있던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하여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시위대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자, 일제 헌병 노가미(野上美喜男)와 하야사(早坂茂利)가 무력으로 선두에 있던 깃발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에 박성록·김용구를 비롯한 시위대는 깃발을 빼기지 않기 위해 일제 헌병과 몸싸움을 벌였다. 박성록은 오장 노가미를 논 속으로 밀어 떨어뜨리며 깃발을 지켰고, 김용구는 헌병을 발로 차며 깃발을 빼앗기지 않았다. 시위대도 일제 헌병 2명을 붙잡아 논바닥에 밀어 넣고 무력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일제 헌병이 열세에 놓였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일제는 헌병분견소 헌병과 수비대를 급파하여 시위대를 다시 한 번 저지하였다. 시위대는 이들에 맞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계속 행진하였다. 그러자 일제 헌병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였고, 시위대는 고개 너머로 피하였다. 하지만 김창의·박성록과 함께 붙잡히면서 시위대는 결국 해산당하였다. 이 일로 1919년 5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 해 9월 20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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