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潤植
潤植1879. 3. 3 ~ 1955. 12. 1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1919년 수원군 송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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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1879년 3월 3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현 화성시) 송산면(松山面) 사강리(沙江里)에서 태어났다. 농사를 지으면서 식당도 함께 운영하였다. 한문을 1년 정도 공부한 바 있다. 이명은 이석춘(李惜春)이고, 한자가 다른 이윤식(李允植)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28일 송산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확산되면서 송산면에서도 만세시위가 계획되었다. 송산면에서 만세시위가 처음으로 일어난 것은 3월 26일이었다. 호세(戶稅)를 납부하기 위해 구장(區長)인 홍명선(洪明善)의 집에 모여 있던 120여 명의 주민들이 독립선언서의 취지에 찬동하여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오후 5시경 송산면사무소 부근으로 이동하여 태극기를 걸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장날인 3월 28일 사강리를 포함한 인근 마을 주민들이 사강시장으로 모여들었다. 일제 경찰은 시장에 모인 사람들이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우려하여 점포를 닫도록 하는 등 사전에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28일 아침 10시경 사강시장에 모인 사람들이 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가 다시 거행되었다. 11시 무렵에는 홍면옥(洪冕玉)의 집에서 홍효선(洪孝善)·김창준(金昌俊)·왕광연(王光演)·홍문선(洪文善) 등이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사강리와 인근 마을 주민들과 합세하여 송산면사무소 뒷산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백포(白布)에 염색하여 만든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1,000여 명에 이른다. 이처럼 만세시위가 확산되자 노구치(野口廣三) 경찰부장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노구치 순사는 주도자로 보이는 홍면옥·이규선(李奎善)·예종구(芮鍾九)를 붙잡아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홍면옥이 이에 저항하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노구치의 발포로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주민들이 격분하여 노구치에게 거세게 항의하였다. 사태가 험악해져 더 이상 걷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노구치는 자전거를 타고 남양(南陽) 방면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과 함께 도망가는 경찰부장을 향해 돌을 던지며 추격하였다. 결국 노구치 순사는 자전거에서 떨어졌고, 마을 사람들이 던진 돌과 곤봉 등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이 일로 1919년 5월 9일경 붙잡혀 1920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 살인으로 징역 6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 산입)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영진(한역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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