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允章
允章1923. 5. 6 ~ 2018. 3. 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 · 한국광복군 제2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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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923년 5월 6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이광(李光)과 김수현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이명은 이화영(李華英)이다. 아버지 이광은 신민회(新民會) 간부이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대한민국 제6대 체신부장관을 역임하였다. 동생인 이윤철(李允哲)은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서 항일투쟁에 종사하였고, 광복 이후 공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아버지 이광이 당시 중국 국민당 고위 간부였던 성스차이(盛世才)와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동문이었던 인연으로 허베이성(河北省) 국민정부에서 관료로 근무하는 동안 베이징 내 교회에 설치된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이수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 일제가 중국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자 일가족과 함께 일제의 위협을 피해 톈진(天津)·상하이(上海) 등지를 유랑하였다.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켜 상하이를 침공할 때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피신하여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이후 동생 이윤철과 함께 1938년 중국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가입하여 중국 내 한국인들을 규합하는 한편, 항일 공연 활동을 통한 민족의식 함양에 힘썼다. 임시정부가 위치한 충칭(重慶)에 거주하던 중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1942년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奭)의 주선 하에 청두(成都)에 있던 국민혁명군 육군중앙군관학교(陸軍中央軍官學校)에 제19기생으로 입학하여 2년 6개월간 초급장교 훈련을 받고 보병과(步兵科)를 졸업하였다. 1944년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장교 계급의 본부 요원으로 활동하며 신입 대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훈련 및 정훈 임무에 종사하였다. 이때 임시정부와 미국 전략첩보기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사이에 독수리 작전(the Eagle Project) 계획이 수립되었다. 1945년 4월 3일 임시정부의 김구(金九) 주석 및 광복군 지도부와 OSS 대위 클라이드 사전트(Clyde B. Sargent)가 만남을 갖고, 한반도 탈환에 앞선 국내진공작전이자 광복군과 OSS 사이 공동첩보작전인 독수리 작전을 최종 승인하였다. 독수리 작전은 OSS 측이 각각 광복군 제2지대와 제3지대에서 적합한 대원들을 선발하여 OSS 첩보훈련을 시킨 후 잠수함이나 낙하산을 통해 한반도에 잠입한다는 계획으로 추진되었다. 이에 1945년 5월 이후, 다른 광복군 제2지대원과 함께 OSS 훈련에 선발되어 참가하였다. 약 3개월간 잠입 및 사보타주를 위한 유격·폭파훈련과 암호통신 교육을 마치고 독수리 요원에 최종 선발되어 정보·파괴반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이재현(李在賢)·민영수(閔泳秀) 등과 함께 본부 요원으로서 이범석 휘하에서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의 작전을 감독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후 독수리 작전을 무산되었고, 이후 광복군 소속으로 국민혁명군을 도와 중국 내 일본군의 무장해제 작업 및 관할 내 치안 유지, 한국인들의 신변 보호 및 귀국 절차 원호를 담당하였다. 1946년 귀국을 앞둔 상황에서 중국 각지에 흩어져 한국인 신변 보호 활동에 앞장서고 있던 다른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귀국을 포기하고, 국민혁명군에 다시 입대하였다. 수송부대에서 복무하던 중 1949년 12월 7일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고 타이완(臺灣)으로 후퇴할 때 다른 국민혁명군 부대와 함께 타이완으로 이동하였다. 타이완 거주 중 광복군 참모장 출신으로 당시 중화민국 대사직을 맡고 있던 김홍일(金弘壹)의 도움을 받아 1957년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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