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寅九
寅九1877. 10. 26 ~ 1924. 2.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함안군 함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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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7년 10월 26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여항면(艅航面) 외암리(外岩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일어난 함안군 함안면(咸安面)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함안면 만세시위는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했던 지역 인사들이 1919년 3월 5일에 돌아와서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계획되었다. 이들과 지역의 항일민족주의 인사들은 모여서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시위는 장날인 3월 19일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시작되었다. 태평루(太平樓)에 태극기가 걸리고, 동명학교 교사 이희석(李喜錫)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때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장날이었기 때문에 함안면에 나와 있던 많은 사람이 만세시위에 동참하여 시위대는 짧은 시간에 3,000 명까지 불어났다. 시위대는 함안 경찰관주재소, 함안군청, 등기소, 우체국 등을 공격하였다.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적 기관들을 공격하고 관계자들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데 앞장섰다. 시위 군중의 규모가 급격히 늘어나고, 식민 지배의 주요 행정기관을 습격하여 기물 파손과 투석전 등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자, 일제 경찰은 시위 진압을 위하여 마산(馬山)의 일본군 수비대 파견을 요청하였다. 수비대중포병대대가 도착하고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으로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시위대의 기세가 꺾이자 주동자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가 이루어졌다. 이때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3년의 형기를 마치고 풀려났으나, 1924년 2월 17일 무고한 마을 처녀를 주재소로 연행하는 일제 경찰에 항의하다가 살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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