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承龍
承龍1853. 1. 17 ~ 1896. 2. 1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승룡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03)
관련 사건
- · 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3) 1853년 1월 17일 경기도 양근군(楊根郡) 동종면(東終面) 대곡리(大谷里, 현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대흥리)에서 오위장(五衛將) 이은석(李殷錫)과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해(靑海)이고, 자는 수운(秀雲)이며, 호는 금파(錦坡)이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익혀 10세에 사서삼경을 읽었으며, 1886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벽에 ‘의병장의승룡’이라 적고 상경했다고 전해진다. 1877년 무과에 급제한 이후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1890년에는 통정대부에 올라 강령현감과 해주진관 병마절제도위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당시 살해된 민겸호(閔謙鎬)의 시신을 수습해 아들인 민영환(閔泳煥)에게 인도하여, 이후 교분이 두터웠다고 알려져 있다.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제 낭인들에게 시해되고,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됨에 따라 전국의 유림들을 중심으로 배일감정이 고조되었다. 이에 화서학파(華西學派), 정재학파(定齋學派), 남당학파(南塘學派), 노사학파(蘆沙學派)를 중심으로 위정척사운동이 전개되었고, 이를 배경으로 을미의병(乙未義兵)이 일어났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양근에서 의병을 일으켜 복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척왜국모보수지기(斥倭國母報讐之旗)’라고 쓴 깃발 30개를 세워놓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1896년 2월 아들 이연년(李延秊)에게 집안을 부탁하고, 모집한 의병부대를 이끌고 서울로 이동하였고, 2월 하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항전을 준비하였다. 이때 남한산성에는 광주의병장 심영택(沈營澤)·이천의병장 박주영(朴周英)·양근의병장 이석용(李錫容) 등이 약 1,600명 정도의 의병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양근의병장으로 거론된 이석용은 아직까지 특정되지 않으며, 당시 남한산성에 입성한 양근의 의병장으로는 유일하기 때문에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후 의병들을 훈련시키고 서울 진격 계획을 수립하면서 경기도에 격서(檄書)를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또한 토역복수(討逆復讐)를 하자며 광주군수 박기인(朴基仁)에게 권유하였지만, 거부하자 처단하였다. 같은 해 3월 22일 새벽 2시경 남한산성의 의병들과 함께 공격해 온 관군·일본군에 맞서 싸워다가, 오전 4시 30분경 동문으로 빠져나와 양근 방향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서울의 윤 모(模)로부터 내외에서 협공하자는 비밀 서신을 받고 서울로 올라갔다가 관군에게 붙잡혔고, 같은 해 (음)2월 14일 남한산성으로 끌려와 남은 의병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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