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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龜

承龜

1865. 7. 22 ~ 1931.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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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承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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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槐山)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괴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유인석 의병부대
  • · 이강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5)

관련 사건

  • · 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5) 1865년 7월 22일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연풍면(延豊面)에서 태어났다. 충북 괴산군 상모면(上毛面) 수회리(水回里, 현 충북 충주시 상모면 수회리)에서 출생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충북 충주군(忠州郡) 살미면(乷味面) 문화리(文化里)에서도 거주하였다. 자는 성문(聖文)이며, 호는 치당(恥堂) 또는 설해(雪海)이다.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으로 화서학파의 학문적 풍토 속에서 의병항쟁을 위한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일제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공포하면서 한국의 국권을 침해하고 병탄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자, 이에 분개한 유생들이 거의를 결심한 유인석(柳麟錫)의 편지를 받고 강원도 영월(寧越)로 결집하였다. 본래 처변삼사(處變三事) 가운데 ‘도해(渡海)’의 길을 택하고 만주로 넘어가려던 유인석은 원주 안창리에서 거의한 의병부대가 단양전투 이후 영월로 퇴군했다는 소식을 듣자, 중국 랴오둥(遼東)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거의(擧義)’를 결정하였다. 1896년 1월 28일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하는 호좌(湖左) 의병부대가 결성되었다. ‘호좌의진’이라고도 부르는 제천의병은 이후 친일 관리로 일제가 추진한 단발령을 강요하여 일제의 시책에 적극 부응한 단양군수 권숙(權潚)과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를 처단하면서 본격적인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1896년 2월 16일에는 충주성을 공격해 다음 날 함락시켰고,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단하였다. 충주성 점령 이후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항쟁을 이어가던 제천의병에게 군자금을 제공하여, 의병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충주성을 내어준 호좌 의병부대는 충북 청풍(淸風, 현 제천시)·단양(丹陽)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 시기 이인영(李麟榮)과 이강년(李康秊) 등이 강원 원주(原州)와 경북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모아 합세하여 잠시 사기를 회복하였으나, 결국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공격과 내부 분열로 유인석이 랴오둥으로의 서행(西行)을 결정하게 되면서 을미의병이 마무리되었다. 을미의병 이후에는 유인석과의 연계를 이어가며 학문 연마에 집중하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중 1907년 일제에 의한 광무황제(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에 분노한 이강년(李康秊)이 제천에서 거의하자, 함께 참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상중이라는 이유로 의병장 이강년이 만류하면서 의병부대에 직접 합류하지는 못하였다. 이때 이강년은 직접 서한을 보내 함께 할 수 없는 것을 위로하면서, “의진에 참여한 것이나 그 요체는 하나”라고 이야기하였다. 이후 이강년 의병장이 1908년 작성(鵲城)전투에서 잡혀 그해 10월 사형당하자, 제문을 지어 애도하였다. 문집으로 『치당유고(恥堂遺稿)』가 있으며, 유인석 휘하에서 종군한 항재(恒齋) 이정규(李正奎)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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