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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龍善

善

1882. 12. 27 ~ 1960.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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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龍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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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陜川)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합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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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합천군 합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2년 12월 27일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대양면(大陽面) 무곡리(茂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0일 합천군 대양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합천군 대양면 만세운동은 대양면 출신 유림 강홍렬(姜弘烈)이 상경하여 서울 만세운동 소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가져온 것이 시작이었다. 대양면 대목리(大目里)의 심재기(沈載祺)·심진환(沈瑨煥) 등이 대목리 이계(伊溪)의 수암정(修巖亭)에서 거사를 논의한 끝에 1919년 3월 19일 합천면 시위를 주도하였다. 합천면 시위의 주도 인사들이 대부분 대양면 출신들이었고, 면민들이 대규모로 시위에 참가하였다. 합천면 장날이었던 3월 19일 대양면민들을 포함하여 약 500명의 군중이 읍내 거리를 누비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합천경찰서 경찰들의 진압으로 많은 사람들이 검거되자 분노한 대양면민들은 다음 날인 3월 20일 재궐기하였다. 대목리 마정(馬亭) 부락에 면민들과 함께 모여 다음 날 만세시위를 결의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결의 과정에서 시위대의 선두에서 죽음을 불사하며 항거할 결사대가 조직되었다. 이때 심맹권(沈孟權) 등과 함께 결사대에 참여하였다. 결사대는 총 12명이었는데, 함께 명부를 만들어 이름을 적고 무인을 눌러 시위대의 선두에서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 등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헌신할 것을 결의하였다. 결사대의 일원으로 시위대의 선두에서 행렬을 이끌고 합천면으로 향하였다. 합천면 거리에 모여 있던 군중들과 합세하여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7시경 결사대 대원들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서 합천경찰서로 갔다. 경찰서를 둘러싸고 일제 경찰과 대치하며 19일 만세시위로 검거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합천경찰서장은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분노한 시위대와 함께 선두에서 합천경찰서로 돌진하자 일제 경찰들은 공포탄을 쏘며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의 기세가 더욱 거세지자, 실탄 사격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김영기(金永琪)·추용만(秋鏞滿) 등 4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 주도 인물 중 한 명으로 붙잡혀 경찰의 조사를 거친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4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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