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禮模
模1883. 9. 20 ~ 1954. 10.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남해군 남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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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3년 9월 20일 경상남도 남해군(南海郡) 설천면(雪川面) 남양리(南陽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4일 남해군 남해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남해군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0일 남해면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4월 초에 집중적으로 만세시위가 발생하였다. 2일부터 6일까지 고현면(古縣面)·설천면(雪川面)·남해면 시장이 중심지였다. 남해군 각지의 만세시위에 개입하였다. 특히 4월 3일 고향인 설천면 남양리 만세시위와 다음 날인 4월 4일 남해면 시장에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 시작은 인근 하동군(河東郡)에 들어가 그곳 인사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가져온 것이다. ‘대한독립선언서’라는 이름의 선언서는 3월 18일 하동면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이 자체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본인의 집에서 정학순(鄭學淳)·정순조(鄭順祚)·정몽호(鄭夢虎) 등에게 보여주고 만세시위를 제안하였고, 참석자들도 흔쾌히 동의하고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시위대 맨 앞에 세울 장대에 매달 큰 태극기의 제작, 군중 동원을 위한 각 동리별 연락 등의 역할 분담도 주도적으로 계획하였다. 4월 3일 만세시위는 오후 3시경 설천면 남양리에서 군중과 함께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시위를 하기 전에 연락을 받고 뜻을 같이 하기 위해 모인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군중 앞에서 직접 하동군에서 가져온 대한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정순조는 옆에서 장대에 높게 단 큰 태극기를 들었다. 독립선언서 낭독을 마치고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군중이 따라서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대를 지휘하여 남해군 중심지로 나아갔다. 그러나 도중에 고현면에 이르렀을 때, 이곳 면장 김치관(金致寬)이 경찰주재소에 만세시위를 밀고한 것을 알게 되었다. 정순조 등 시위 주도자들과 논의한 끝에 일단 해산하고, 다음 날인 4월 4일 곧바로 남해면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다시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4일이 시장의 장날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는 점도 감안한 조치였다. 4월 4일 정순조 등 전날의 설천면 시위 주도 인사들과 함께 남해면 시장으로 갔다. 전날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도 집결하였고, 예상한 대로 장날을 맞이하여 군내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은 붐비는 오후 2시경 시장 한가운데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이 호응하였다. 남해면 시장은 순식간에 시위대에 의해 장악되었고, 이들을 지휘하여 거리를 행진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 수탈과 억압의 상징적 기관인 군청, 경찰관주재소, 금융조합사무실, 우편국, 공립보통학교 등에 물리력을 행사하며 의분을 표현하였으며, 건물 안으로 몰려 들어가 기물과 집기를 파손하고 직원들에게 만세를 부르도록 요구하였다. 만세시위의 열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양되었지만, 사천(泗川)경찰서 증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시위대는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 경찰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검을 휘두르며 폭력적으로 강제 해산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결국 시위대가 흩어지게 되면서 일제 경찰들은 대대적인 주도자 색출에 나섰고, 윤주순(尹柱舜) 등 20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붙잡혔다. 일제 경찰의 혹독한 조사를 거친 후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7월 15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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