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73. 1. 3 ~ 1936. 7. 1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민종식 의병부대(홍주의병)
- · 독립의군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중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73년 1월 3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남천리(南川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인조반정 때 공신이었던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둘째 아들로 숙부인 이자(李資)에게 양자로 갔던 사우당(四友堂) 이시담(李時聃)의 후손이다. 자는 호징(虎徵)이고, ‘이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호는 신구당(愼懼堂)으로, 대마도에서 함께 유배하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지어주었다.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익히고, 진사 윤겸선(尹兼善) 문하에서 시를 배웠다. 12세 때 관례를 치르고, 충남 공주(公州)의 박윤현(朴允鉉)의 딸 함양 박씨(咸陽朴氏)와 결혼하였다. 22세 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는데, 청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공주 방면으로 이동한다는 얘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할 때, 이들을 안정시켰다. 29세가 되자 충남 청양에 내려와 있던 최익현을 찾아가 스승의 예를 갖추고 사제 관계를 맺어 학문을 연마하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이에 분개하여 각지의 선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13도 유약소(儒約所)’에 가입하였다. 유약회의 일원으로 김동필(金東弼)·경현수(慶賢洙)·이봉학(李鳳學)·강원형(姜遠馨)·이인순(李麟淳)·전덕원(全德元) 등과 교류하였다. 그러면서 고종에게 상소를 보내거나, 각국 공사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호소문을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김연식(金璉植)·박성준(朴聖俊) 등의 밀고로 조직이 와해되면서, 이때 옥고를 겪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6년 3월 풀려나 충남 예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의병을 일으켰다가 청양의 합천(合川) 전투에서 패해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민종식(閔宗植)이 그 해 5월 11일 홍산(鴻山) 지치(芝峙)에서 이용규(李容奎)·이상구(李相龜)·이세영(李世永)·문석환(文奭煥) 등과 함께 다시 한번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천(舒川)과 남포(藍浦)를 경유하면서 군사를 초모하고 군수품을 수합하였고, 각지에서 의병을 모아 합류한 이들과 함께 홍주부(洪州府)로 진군하였다. 의병부대가 홍주로 들어왔을 때 신보균(申輔均)·신현두(申鉉斗)·안항식(安恒植) 등이 차례로 합류하였으며, 이때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후 안병찬(安炳瓚)·박창로(朴昌魯)·안항식·신복균(申復均)·이용규 등과 함께 의병부대의 참모사(參謀士)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민종식 의병부대의 참여 시기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의사이용규전』에서는 홍산 지치에서부터 참여하여 서천·남포 등지를 거쳐, 5월 19일 삼신당리(三神堂里)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홍주성에 입성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홍양기사』를 살펴보면 의병부대가 홍주성에 들어온 뒤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민종식 의병부대가 홍주성에 입성한 다음 날인 5월 20일부터 일본군의 공성이 시작되었다. 이때 의병부대와 함께 10여 일 동안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하며 수성하였다. 그러나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명령으로 보병 2개 중대를 비롯한 일본군과 홍주 부근의 관군과 수비대 등이 1906년 5월 31일 새벽 총공세를 퍼부으면서 패배하였다. 이후 윤석봉(尹錫鳳)·이상두(李相斗)·신현두·유준근(柳濬根) 등 80여 명과 함께 붙잡혀, 서울의 일본군사령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1906년 7월 윤석봉을 비롯한 70여 명이 석방되었으나, 남규진(南奎振)·유준근·신현두·이상구·문석환·신보균·최상집(崔相集)·안항식 등 8명과 함께 일본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소위 홍주 9의사(洪州九義士)로 불리는 이들 가운데 유준근·남규진·신현두와 함께 무기징역을 받았다.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대마도 유배생활에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고, 일본에 저항하였다. 유준근과 함께 일제가 제공한 옷을 거부하며, “나는 한국 사람이니 당연히 한국 의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또 유준근·안항식·남규진과 함께 매월마다 한국 방향의 북쪽을 바라보며 4번 절하는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일제에 대한 항거의 뜻을 명확히 하였다. 이후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이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붙잡혀 대마도로 유배되어 도착하자, 동료들과 함께 만났다. 최익현이 7절 1수의 시를 짓자 동료들과 더불어 답시를 지었다. “다시 선생님의 이 행차 뵈오니, 절하는 자리에 슬픈 마음 금할 길 없네. 적으나마 한 줄기 희망 찾을 곳 없으나, 대의(大義)는 우뢰 같아 만국에 소리나리.”라며 최익현의 시에 화답하면서 일제에 억류된 상황을 한탄하고 대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후에도 억류된 최익현 등 동지들과 함께 시문을 짓고, 한국 병합을 목전에 둔 현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교류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1907년 1월 1일 일제가 주는 음식은 단 하나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단행하던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서거하자, 동료들과 함께 집사(執事)가 되어 장례를 치렀다. 이때 부집례(副執禮)를 맡아 도집례(都執禮)를 맡은 임병찬, 사화(司貨)를 맡은 신현두, 호상(護喪)을 맡은 노병희(盧炳憙), 사서(司書)를 맡은 문석환 등을 비롯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어 있던 이들과 함께 모두 흰 두건을 쓰고 통곡하며 존제(尊祭)를 지내고 관을 옮겼다. 1907년 풀려났다. 한편 1909년 1월 석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함께 유배 간 유준근이 엮은 『마도일기(馬島日記)』에는 대마도에서 생활하며 지은 우국시가 다수 수록되어 있고, 일제의 의한 탄압이나 모욕 등 유배생활을 하면서 겪은 고초와 관련된 자료 등도 남아 있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후 고향에서 은거하며 때를 기다렸다. 경술국치 이후인 1912년 대마도에서 함께 유배 생활을 했던 임병찬에게 고종의 밀지를 전달하라는 임무를 맡아,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독립의군부 전남 순무대장으로 임명된 임병찬이 일제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제출하고 대규모 의병봉기를 계획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4년 5월 체포되면서 독립의군부 조직이 발각될 때 다시 붙잡히게 되었다. 풀려난 이후 전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1936년 7월 13일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사망하였다. 문집과 연기를 기록한 『(愼懼堂集)』과 『(愼懼堂年紀)』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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